Jost Amman
1539~1591. 스위스·독일의 화가, 판화가. 아만은 고전학과 논리학 교수 요한 야코프와 엘리자베타 에거 사이의 막내아들로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교개혁자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행동적인 츠빙글리와 친하였는데, 1531년 스위스 종교전쟁의 선두에 섰던 츠빙글리는 세상을 떠나고, 그의 딸 리글러가 요스트를 안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12세에 종교개혁에 관한 문장을 써서 교사를 놀라게 한 근면한 학생이었으나, 요스트는 금세공인 형 요수아(1531~1564)와 같은 생활을 하고 싶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화가 요스트 아만은 목판조각사가 모이는 영광의 스위스의 도시에서 나날을 보내며, 판각전업자가 많은 그 무렵으로는 드물게 자기가 그림그리고 자기가 목판을 새겨 가지고 인쇄자나 인쇄·출판자와 맺는 길을 내디뎠는데, 그 스승의 계통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의 경력은 1561년의 뉘른베르크의 축제의 소묘 제작 등 그때부터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한 사실로 알 수 있는데, 그곳에서 시민권을 취득하여 1591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살았다. 그는 처음에는 그때 책 삽화의 주요 생산자인 비르길 졸리스(Virgil Solis, 1514~1562)와 함께 일하였다. 그의 생산성은 매우 놀랄 만해서, 그가 4년 동안에 만든 도면이 큰 짐마차에 가득 찰 만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수많은 원화가 베를린의 인쇄소에 있었다. 그는 책을 위한 목판화의 마지막 주요 제작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경력 동안 판화는 점차 그 역할을 떠맡고 있었다. 1576년에 짤막한 일대기로 된 프랑스 왕들의 동판화 시리즈가 아만에 의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현했다. 그는 또한 지기스문트 포이아벤드에 의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출판되는 성경에 들어가는 목판화 삽화와 필리프 아피안에 의한 바바리아(바이에른)의 지형 측량에 관한 목판화 삽화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었다. 그 밖에 다른 시리즈 작업으로 1568년에 이 책 ‘직업의 책’을 내기 위한 목판화 114개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의 묘사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 수 있는 위대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다. 아만은 뉘른베르크에서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Hans Sachs
1494~1576. 독일의 시인, 극작가. 직업은 제화공의 마이스터. 뉘른베르크 출생. 7세에 고향의 교회 부속 라틴어학교에 들어가 8년 동안 신인문주의 교육을 받고, 1508년 15세에 졸업 후 제화공의 도제가 되어 구둣방에서 일했다. 1512년에 도제의 고용살이 기간이 끝나 유럽 각지로 편력 여행을 떠났다. 그 사이에 작시 수업에도 열중하고 마이스터징거의 모임에도 출입했다. 1516년 가을에 편력 여행을 마치고 귀향했으며, 1519년에 결혼하고 이듬해 1520년 1월에 제화공의 마이스터로 독립하였다. 일생 동안 뉘른베르크를 떠나지 않고 구두를 만드는 한편, 시작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어, 작스는 개혁의 주도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깊이 빠져서 1523년에 ‘비텐베르크의 나이팅게일’이라는 500행 대서사시를 발표하여 루터를 찬양하였다. 이 시는 판을 거듭하여 한스 작스의 이름을 온 독일에 알리게 되었다. 작스는 1524년에 4편으로 된 ‘대화(對話)’를 발표하여 신교 보급에 기여했다. 그러나, 1527년 ‘교황제에 관한 이상야릇한 예언’으로 필화를 입어 시 당국으로부터 한때 출판 활동이 금지되었다. 1530년, ‘뉘른베르크시를 기리는 시’에 의해 창작 활동을 재개했다. 1560년 전후 작스는 자기 저작을 집대성하려고 ‘폴리오판 전집’ 3권을 출판하였다. 1566년부터 1567년에 걸쳐 자서전적 시 ‘나의 시업의 모든 것’을 지었다. 1576년 1월 19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뉘른베르크 시내의 성요한성당 묘지에 묻혔다. 작스는 일생 동안 4,374편의 마이스터 노래, 약 2,000의 축사가, 120 이상의 비희극、85편의 사육제극, 7편의 산문 대화를 남겼다. 작품의 주제는 루터 번역 성경의 한 절, 오랜 교회 제도에 대한 풍자, 시사적인 사건의 기록, 도덕적인 교훈을 담은 우화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