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류문명사에서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21세기, 새천년이 시작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 현재에도 고대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종교와 사상이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21세기 문명을 흔히 해체주의, 포스트모던 시대, 탈권위 시대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근대문명이 보여주었던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그리고 봉건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문명의 전환점에 서있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를 누리고 있으며, 사상적 제약과 교리적 굴레에 갖혀 나오지 않고 있다. 종교가 제도화되고 기득권을 누릴 때,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오히려 교리에 훼손을 받을까 폐쇄적인 자세를 더욱 두텁게 하는 경향이다.
처음에 종교들은 자연과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문제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화되고, 고정되고, 교리화되고, 절대화되면서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역기능을 보였다. 그래서 제 종교들은 자기 틀 속에 갇히게 되었고,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속성과 갈등을 보이면서 자기 확대를 이루어왔다. 물론 각 종교의 경전은 인간에 대한 한없는 자비와 사랑 그리고 용서와 관용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자기 종교의 범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를 넘어서기란 사실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각 종교의 학문 영역에서도 같은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근, 현대사를 보면 유럽 국가들이 그리스도교를 앞세워 아프리카,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백성의 정신과 문화를 빼앗는데 앞장서 왔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성경과 제국주의’를 앞세워 지난 1천오백 여년 넘도록 토착문화와 토착종교를 무시하고 말살하면서 ‘선교’를 했다. 그래서 서양의 제국주의를 확대시키고 서양 문화의 우월성을 심는데, 그리스도교를 앞세웠다.
1960년대 이후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반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리스도교는 서양문화와 과학의 우월성을 무기로 불교와 토착문화와 종교, 사상 등에 대해서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는 서양의 보수적인 선교사와 그 영향을 받은 교회가 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종교 간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고 갈등이 잠복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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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정복과 박해를 받던 국가이고, 구약의 신도 이런 박해받는 민족의 고통을 싸매주고 결속하게 하는 ‘방패의 종교’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처음에 박해를 받으며 숨어 지내던 방어적인 처지에서, 합법화 이후 공격적인 종교로 변모한 이래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항상 세계사의 정치, 군사 권력의 중심에 있어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학 역시 창의 논리로 나갔을 수도 그리고 나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원래의 본문이 방어적 상황이었을 때 쓰여졌는데, 공격적 혹은 지배적 상황으로 바뀌었을 때, 그 본문의 쓰임새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신神 개념도 주변 강대국가들의 많은 신들 속에서 약소국가의 신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신의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강대국가의 신이 되었을 때의 논리로 적용시키면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약소국가였을 때 신의 역할과 속성은 잊혀지고, 강대국가의 세계지배 논리로 일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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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쉼 없이 달려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제의 강점기, 한국전쟁, 4.19 혁명, 유신시대, 광주민주화운동,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의 숱한 민족적 고난과 아픔을 겪으며 이겨내 왔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지만, 거꾸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교회가 사회와 등 돌려 외면하고 자기 확장에만 치우쳤기 때문이다. 진보신학자들과 일부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를 대변하고 사회정의를 외친 것 외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회에 대하여 귀와 입을 다문 채 듣지도 않았고,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령 충만’,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병고치고, 구원받고, 천당 가고, …’하는 개인의 이기심에 편승한 신앙에 충실(?)했다고 본다. 한국종교사에서 불교도, 유교도 모두 과거에 호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흘러가고 있는데도, 한국의 신학은 교회 성장을 위해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기차를 보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기독교학회와 각 분야의 학회들조차도 애써 외면하거나 호교론적인 주제들로 채우고 있다. 한국의 신학과 신학대학은 한국 교회들이 궤도를 이탈해가도록 장단을 맞추거나, 아니면 교단의 권력과 돈에 무기력하게 눌려 무관심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와 교단의 권력은 이미 중세시대를 방불케 하고, 자기반성은 고작 수십 년간 ‘회개’라는 입 서비스로만 하는데 익숙해져서 신뢰감을 상실한지 오래다. 한 교단 안에도 수 십 개의 파들이 서로가 남남으로 나누어져있고,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다. 많은 신학대학원들이 경영 유지를 넘어서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목회후보자 학생 수를 늘리는데 급급하고, 대형 강의실에서 대량생산으로 찍어내는 붕어빵식 교육을 하는 현실이다. 이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성교육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교회 수는 제한되어 있는데, 목회자가 과잉 배출되다보니, 적자생존의 치열하고도 비굴한 경쟁이 된 지 오래이다. 한국의 신학교육도, 교회현장도 보수화되면서 점차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오히려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교리적으로만 보니까, 역사 속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이 사회의 눈총으로 주춤하는 사이에, 이런 일들이 중, 소 교회에서는 흔한 사례가 되어 가고 있다. 교회를 개인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목회자)는 평신도들에게 다양한 사상과 비판적 사고를 차단한 채 교회에 우둔하게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내몰고 있다. 일부 교단은 권력 자리를 놓고 치열한 비방과 금품이 살포되고 비상식적인 선거들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