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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 1500~1800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 1500~1800

: 대항해 시대 중국과 유럽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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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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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11쪽 | 436g | 148*210*30mm
ISBN13 9788958622802
ISBN10 895862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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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조는 마테오 리치가 가르쳐준 수학과 천문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보다도 리치의 품성에 더 많이 이끌렸다. 그는 세 명 가운데서도 리치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지만, 영세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됐던 것은 첩을 내쳐야 하는 부분이었다. 첩을 두는 관행이야말로 중국 문인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할 때 부딪히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중국의 부유한 남성들은 성적인 욕망을 채우거나 대를 잇기 위해서 또 다른 부인이나 첩을 거느렸다. 첩들은 본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할 때 종종 후손을 안겨주었다. 후손을 생산하는 것은 조상 숭배를 큰 덕목으로 여기는 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첩의 지위는 본부인보다 낮고 불안했지만, 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가족의 일원이었다. 기독교 신자로 세례를 받기 위해 첩을 내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고, 사랑과 자비를 덕목으로 하는 기독교의 종교성과 모순되게 보였다. 그래도 기독교에서 일부일처주의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다. 기독교도가 된 중국인들이 자신의 딸들을 노예나 첩으로 파는 일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 「만남의 장_ 동양, 서양을 맞이하다」 중에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유럽을 방문한 많지 않은 초기의 중국인들과 달리, 심복종의 유럽 방문은 큰 관심을 받았다. 2년 동안의 긴 여행을 통해 쿠플레 신부와 심복종은 1683년 10월에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쿠플레는 심복종이 입고 있는 중국식 복장 등 그가 갖고 있는 이국적인 특질을 의식적으로 이용하여 선교활동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려 했다. 심복종은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라틴어 교육도 받았다. 그들이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미사를 거행했을 때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4세는 삼복종이 상아로 만든 작은 젓가락을 이용해 식사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특별한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 궁전 안에 있는 모든 분수를 틀게 했다. 1685년 로마에서 쿠플레와 심복종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를 만났다. 다시 1687년 런던에서는 궁정 연회에 초대되었고, 이 자리에서 제임스 2세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고트프리 크넬러(Godfrey Kneller) 경에게 중국 복장을 한 심복종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다. 심복종은 리스본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1690년에 처음으로 신에 대한 맹세를 올렸다. 그렇지만 그는 고향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1691년 귀국 도중에 전염병으로 그는 사망했다. --- 「이해의 장_ 서양, 동양을 해석하다」 중에서

예수회는 자신들의 본토 적응 계획을 유럽에서 합리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는 일정한 자연적 종교가 있다는 관념을 개발했다. 그들은 유학사상에는 자연계와 인간의 이성에서 유추된 진리가 담겨 있지만, 기독교의 계시라는 진리만은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관점에 따르면, 유학이 가르치는 대부분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진리, 예를 들어 부모님을 공경하고 남을 자신처럼 대하는 것들은 기독교와 비슷했다. 죽은 조상을 위한 일부 미신적인 의식이나 일부다처제 등과 같은 기독교와 대립하는 유학의 내용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버려야 될 것이었다. 공자는 종교적인 지도자라기보다는 스승과 학자로 비추어졌다.
(중략)
또 하나의 격렬한 논쟁은 ‘God’을 한자로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많은 선교사들이 ‘상제(上帝)’와 ‘천(天)’처럼 ‘God’을 나타내는 중국의 전통적인 용어가 기독교 이전의 고대문헌에서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염된 것으로 느낀 반면에, 예수회원들은 기독교와 중국 문화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이 용어들을 사용했다. 비록 이들 용어의 의미가 기독교의 정확한 의미에 맞도록 조정되어야 하지만, 그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기독교가 중국 문화에 결코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받아들여질 만하고, 또 오염되지 않은 신조어로서 예수회는 ‘천주(天主)’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 「이해의 장_ 서양, 동양을 해석하다」 중에서

우리는 ‘초기의 중국 연구자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초기의 중국학 연구자와 후기의 중국학 학자를 구별하기로 한다. 중국어와 중국 문화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는 오류가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터무니없었지만, 그들의 중국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일반 대중에 비해 지적인 유행의 흐름에 덜 취약했다. 초기 중국 연구자들이 가지고 있던 관심은 ‘중국어 입문(Clavis Sinica)’이나 중국어에 대한 ‘열쇠’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 있는 믿음이었다. 그들은 이것들이 중국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학습량을 크게 간략화하거나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열쇠를 개발하려는 생각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언어를 가질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 두고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 미지의 언어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바벨탑으로 인해 무수한 언어들이 생겨났다는 《성경》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는데, 즉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원시언어가 바벨탑의 건설로 더 이상 보편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믿은 것이었다. 어떤 학설은 일단 이러한 보편적인 구조가 다시 발견되면 중국어와 같은 다른 언어를 이해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어가 바벨탑의 언어 혼란 이전부터 있었던 원시언어였다고 믿었다. --- 「이해의 장_ 서양, 동양을 해석하다」 중에서

17세기 말에 루이 14세와 강희제는 선물을 교환했는데, 그 중에는 중국에서 만든 화집이 있었다.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들, 즉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 루이 14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이 애호했던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 그리고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 등은 모두 로코코 미술의 전문가였는데,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중국 예술의 양식을 사용했다. 중국화를 소장하고 있던 와토는 중국 양식을 모방하여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 유럽의 대중은 이 그림들을 중국 양식에 충실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의 우리가 볼 때는 그 차이가 너무 크며, 따라서 그것들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중국-서양의 양식이 혼합된 스타일, 즉 시누아즈리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에는 이 중국을 모조한(pseudo-Chinese) 스타일로 새와 꽂을 그리는 풍조가 널리 유행했다. --- 「이해의 장_ 서양, 동양을 해석하다」 중에서

클레르가 정치사회적으로 최고위 계층들의 도덕 함양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1769년에 자신이 출판한 중국 관련의 저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대우(大禹)와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 histoire chinoise)》라는 책으로, 러시아의 대공(1801년에 암살되는 파벨 1세)에게 헌정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행동에서 볼 때, 그가 책을 출판한 바로 그 해에 대공의 주치의와 사관생도들을 관리하는 책임자라는 두 직책을 겸임한 것은 놀랄 것이 못 된다. 《중국의 역사:대우(大禹)와 공자》를 헌정하면서 클레르는 열다섯 살의 황태자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인 우(禹)를 “국가의 도덕적인 원형”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클레르는 우임금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 중국인들을 덕화(德化)시킨 백성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클레르는 러시아와 중국이 모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시키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클레르 자신이 중국의 역사를 허구화하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 점이다. 요, 순, 우는 중국 고대의 저명한 세 명의 통치자로, 그들은 출생보다도 도덕과 능력의 관점에서 통치자를 고르는 원칙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클레르는 요, 순, 우가 각기 다른 시대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들 세 명의 통치자 중 우임금을 제일로 평가했다.(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 세 명을 전설적인 인물로 보고 있지만, 당시의 유럽인들은 그들을 역사적인 인물로 믿고 있었다.) --- 「오해의 장_ 중국에 대한 오래된 편견들」 중에서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의 필명, 1694~1778)와 다른 계몽주의자들의 노력을 통해서 중국의 도덕과 정치가 언어와 역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것은 유럽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볼테르의 중국에 관한 중요한 정보원은 예수회원들이 만든 수많은 책들이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중국에 호의적이고 공자와 그의 철학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그의 《철학사전(Philosophical Dictionary)》 중의 중국에 관한 항목에서, 볼테르는 중국을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고결한 나라라고 과장되게 칭송했다. 그는 예수회원들을 비판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자를 가장 지고한 도덕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본 볼테르는 무신론자이며 우상숭배자들이라는 공격으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했다. 그는 중국의 종교에는 미신이나 터무니없는 전설이 거의 없다고 함으로써, 기독교에는 반대로 그 같은 것들이 가득 찼다고 암시했다. 볼테르는 또한 중국인들은 하나의 신만 숭배하고 성인(聖人)을 통해서 영적인 교감을 하고 있는 반면, 유럽은 서로 적대하는 다수의 기독교교도들로 분할되어 있다는 암시를 드러냈다. 요컨대 볼테르는 종교개혁 이후에 여러 교파로 분열된 유럽이 중국처럼 이상적인 국가로 바뀌기를 바란 것이다.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자들은 중국이 유교의 합리적인 가치로 황제가 지배하는 개명 군주제의 본보기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군주가 학자 관료 계층과 나랏일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며, 계몽주의자들이 추진한 개명 군주제의 특징적인 본질에 해당한다. 볼테르는 중국의 유가 사대부의 문화 정신이 유럽을 위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오해의 장_ 중국에 대한 오래좵 편견들」 중에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77년에 출판한 한 책에서 인류의 네댓 가지 인종 가운데 백인만이 문명화되었고 나머지 인종은 백인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황인종’ 이론을 상세하게 설명한 첫 번째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로, 1775년과 1785년에 쓴 자신의 저술 속에서 황인종은 주로 몽골인과 통혼하여 중국인을 만든 인도인들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문화를 낮게 평가한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는 중국인을 황색으로 설명했다. 이상은 인종의 차이를 설명한 초보적인 이론이었다. 인종의 우수성과 열등성에 대한 모든 암시는 점차 발전하여 19세기 말 유럽의 제국주의가 높아지던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중국인과 일본인은 서양인으로부터 적대적인 인종주의적 표현인 “황색 위협(yellow peril)”으로 묘사되었다. 이 표현은 무수한 수의 황인종이 백인의 존재와 유럽 문명을 위협한다는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다.
--- 「오해의 장_ 중국에 대한 오래된 편견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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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류의 가장 위대한 시기를 다룬 감탄할 만한 저작! 동서양 예술의 상호 영향, 언어와 민족 문제, 중국 지식인과 기독교 교회 사이의 갈등을 탁월하게 분석한 것이 돋보인다.
조너선 D. 스펜스 (예일 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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