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당시 지방 일간지 가운데서 유력지였던 「영남일보」 사회면에 ‘과부 산통 계주, 야반도주'라는 머리기사와 함께 어머니 이름이 나온 거예요. […] 그 다음날인가 아주 불량한 사람들 서너 명이 집에 들어와서 자는 나를 발로 차며 깨웁디다. 얼굴을 맞고 코피가 터졌는데, 그 꼴로 집에서 도청까지 멱살을 잡혀서 끌려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에 말입니다. 나는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엄마 찾아내라'고 때립니다. 엄청난 일을 당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 - 독립적인 성격이고, 자수성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어린 나이에 큰 시련을 경험한 탓도 있다고 보십니까?
신 - 그렇죠. 어머니의 야반도주 이후에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아 어떻게든 견뎌내고,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대구를 떠나야겠다. 대구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이런 생각이 절박했어요. 어린 나이잖아요. 어떤 일이든지 뚫고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길러진 것 같아요. 그러고 난 다음 서울 올라와서도 대학 떨어지고, 방황하고 좀 헤매기도 하다가 호떡 장사까지 하게 됐는데요. 호떡 장사한 소리를 생전에 어머니한테 하면 ‘창피하게 그 얘기는 하지 마라' 그러셨어요. 나는 호떡 장사가 사회 활동이라면 활동이라고 봅니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잘났고, 좋은 학교 다니면서 잘났네, 잘났다 하던 놈이, 서울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밑바닥 생활을 하는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했던 경험, 그것이 자산이랄까 힘이 됐다고 생각해요.” --- 「1장 절박했으므로 홀로 서다-고통과 시련의 청소년기를 건너」 중에서
“이형표 감독은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신 분으로 영어도 잘하고 일어도 잘했는데, 신상옥 감독의 기술감독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때는 신필림에서 천연색 촬영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직은 천연색 필름이 없을 때였죠. 그런 기술 자문을 해주는 분이었죠. 그분이 “신필림에 볼일 있어서 왔냐? 원서 접수는 했느냐?”고 해요. 그래서 “못했습니다” 했더니 “하고 싶어서 왔느냐?”고 또 물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알았다며 쪽지에다 사인을 해주면서 “신상옥 감독 얼굴은 아느냐?”고 해요. ‘모른다'고 했더니 “최은희 씨는 아느냐?”고 하더라고. 내가 최은희 씨의 「마음의 고향」이라는 작품을 보고 정말 좋아했거든. 나는 그거 보고 최은희 씨를 정말정말 좋아했어. 그래서 “압니다” 했더니 “최은희 씨 옆에 장발을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이 신상옥 감독님이다. 그분한테 가라”고 해요. 그래서 사람들을 뚫고 들어갔더니 밀치고 못 들어오게 해요. 직원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어요. 쪽지를 보였더니 나를 한 손으로 끌어 통과시켰어요.”
“촬영반 들어가서 인사를 하니, 그때 이름도 지어주더라고. […] ‘뉴 스타 넘버원’을 풀면 ‘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죠. 성은 신 감독 성을 따라 ‘申’을 써서, 신성일申星一이 된 거죠.” --- 「2장 뉴 스타 넘버원, 신성일로 다시 태어나다-신상옥 감독과 신필림, 영화 인생의 시작」 중에서
“지 - 불안한 생각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실패하면 군대 갈 각오도 하셨을 테고, 신필름과의 관계도 있었으니까요.
신 - (「아낌없이 주련다」)그 다음부터는 거침없었어요. 김기덕 감독이 극동흥업의 작품을 거의 다 하다시피 했어요. 「아낌없이 주련다」 같은 작품은 지긋하게 나이가 든 여배우에 맞춰 유현목 감독이 했는데, 그에 비해 김기덕은 젊은 감독이었습니다. 이 즈음 김기덕 감독이 극동흥업에서 뭘로 히트 했냐면 「아낌없이 주련다」 직전에 「5인의 해병」을 성공시킵니다. 다음에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를 하면서 「천하일색 양귀비」 「신입사원 미스터리」도 했지요.”
“지 - 출세작 「맨발의 청춘」(1964년)은 스타 시스템의 출발점이라는 평을 듣는데요.
신 - 그렇죠. 스타 시스템이 시작됐죠. 그런 기미는 「청춘교실」에서 이미 보였다고 할 수 있어요. 「청춘교실」에 엄앵란, 신성일, 최지희 등 젊은 배우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그러고 난 다음 결정적으로 「맨발의 청춘」의 두 주인공이 완전히 작품을 끌고 갔어요. 그러니까 스타 시스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죠. 그 후로 두 사람이 출연한 작품이 엄청나게 제작되었고, 히트도 합니다.
지 - 최초의 무비스타로 두 분을 평가하기도 하는데요. 그 말씀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신 - 무비스타라고 불리는 것이 나는 좋아요. 무비스타가 없으면 영화를 보는 매력이 없잖아요. 영화배우는 매력이 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 「3장 무비스타의 거침없는 질주-거장 감독들과의 만남, 이만희 하길종 김기덕 유현목 김수용 정진우」 중에서
“그 시절에 괜찮은 작품들은 다 홍콩으로 갔다고요. 그러고 보면 작품의 질이 괜찮았던 거죠. 동남아시아에서는 먹혔으니까요. 그러니 그 사람들이 사 갔죠. 그때 500불은 김정일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었겠죠. 김정일 위원장이 어린 나이에 영화를 좋아하니까 우리 영화를 다 사가다시피 했어요. 홍콩에서는 500불에 사서 이북에 700~800불을 받고 팔지 않았나 싶어요. 김정일이 1960년대 필름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는 신상옥 감독의 증언도 있어요.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의 필름보관소에 가서 리스트를 봤대요. 보니까, 수천 편이 있는데 「만추」도 있었다고 해요.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 영화를 얼마나 많이 봤으며, 관심이 높았는가 하는 것을 신상옥, 최은희 두 분이 나한테 확인해줬어요. […] 포지티브 필름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극장에서 계속 틀다보니까 필름이 썩어버린 겁니다. 보관용으로 포지티브 필름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수출한 뒤에 오리지널 필름을 반환받을 수 있는 그런 창구와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영화계에 그런 여유가 없었어요. 홍콩에서야 한국으로 반송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요.”
“지 - 「안개」는 지금도 회자되는 작품인데요.
신 - 「안개」는 영상미가 대단한 작품입니다. 그 당시 새로운 연출 기법으로 화제를 모았어요. 원작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죠.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주제가인 「안개」도 훌륭했습니다. 김수용 감독은 ‘컷백’이라는 연출기법을 썼어요. 덕분에 멜로드라마지만 작품이 속도감을 가졌죠. 그래서 김수용 감독이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이때도 윤정희 씨와 내가 같이했죠. 1966년과 1967년은 한참 문학작품들을 영화화했어요. 그때 영화법이 개정되어 우수 작품을 제작하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수입쿼터를 주니까, ‘예술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흡하지만 ‘문예작품’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지요.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것을 대개 문예작품이라고 일컫는데, 최고의 수준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했다 해도, 어느 정도의 수준은 됐었죠. ‘문예’라는 말은 일본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때는 문예작품을 많이 했어요. 김동리, 황순원, 김동인, 심훈, 김래성 등 한국 문학전집에 오르는, 이름 있는 작가의 작품은 대개 다 영화화했죠. 그 가운데 김동리 원작의 「까치소리」도 영화화했어요.” --- 「4장 「만추」도 「오발탄」도 간직하지 못한 한국 영화사의 황금시대-최악의 조건, 최고의 인력이 빚어낸 작품들」 중에서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앞세워 ‘의무 제작’을 시켰습니다. 또 수입쿼터 제도는 이권이 엄청나게 개입된 정부 관리 제도였어요. 정부는 연간 외화 수입 한도를 40편으로 제한했습니다. [중략]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르고 골랐기 때문에 외국 작품은 정말 우수한 작품만 들어왔어요. 그런 판에 한국 영화는 계속 엄격한 검열을 당하는 겁니다. 시나리오 검열, 제작 전 사전 검열, 개봉 전 검열까지 삼중으로 검열을 당했으니 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어요. 게다가 검열을 부르는 사회 분위기도 있었어요. […] 교수라든지, 변호사라든지, 의사라든지. 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조금이라도 비도덕적이고, 불미스러운 것을 다루면 항의가 들어와요. […]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군도 마찬가지였어요. 버스 차장을 다루자면 삥땅, 버스 회사에서 당하는 수모, 인권 문제 같은 게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문제를 다뤘다고 해서 버스 차장들이 데모를 했어요. 그렇게 영화를 못 찍게 하는 세상이었으니 영화를 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교수도 안 돼, 의사도 안 돼, 변호사도 안 돼, 버스 차장도 안 돼… 그러다 찾아낸 게, 항의할 리도 없고 아무 소리도 안 하는 직업군을 다루게 된 겁니다. 그게 호스티스란 말이죠. 그래서 호스티스 영화가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 --- 「5장 ‘만만한 호스티스’와 함께 추락한 한국 영화-통제와 검열의 시대를 살다」 중에서
“지 - 영화를 책임지는 사람이기도 하고, 잔인하게 해야 영화 현장을 꾸려갈 수 있으니까 이기적인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신 - 당연하지. 있어야 돼. 영화배우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제작자가 되면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약점이지. 제작하고 기획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독이 잔인하고 냉혈한 부분을 갖기 바라죠. 그런데 그것은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감독이 그런 것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해야 해! 외국 작품들도 화면 보면 알아요. 감독이 어느 정도 눈을 감고 저것을 찍어댔나 하는 것이 한눈에 보입니다.”
“영화인의 일생과 배우의 일생은 본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영화감독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하면 영화감독으로서만 끝나는 것인데, 영화감독이 제작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영화감독이 제작을 할 때 영화감독으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제작자의 어려움이라든지, 마케팅의 어려움이라든지, 요즘 마케팅 하면 배급인데, 그런 어려움을 겪어보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터득하게 되지. 그걸 터득한 사람이 진정한 영화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자부심이 있어요.”
“나보고 그러더라고. “야, 신 감독, 내 돈 왜 안 주는 거야, 이 사기꾼아” 그래요. 그 소리를 듣고 내가 가만히 있어. 탁자를 빡 때리면서 일어났어요. 그전까지는 내가 늘 ‘형, 형' 했죠. 손위니까. 영화 제작하면서 그 사람 돈 안 쓴 사람이 없었어요. 3부, 3부 5리, 이렇게 이자를 주고 썼어요. 그래서 고리대금업자지. 탁자를 치고 일어나서 “이 새끼야, 내가 너한테 사기 친 게 뭐 있어? 내가 네 돈 받아서 술을 처먹었어? 오입질을 했어? 도박을 했어? 나는 제작을 하고, 선거 치르다가 돈이 없어졌어. 그 돈은 갚으면 될 거 아냐?” 하면서 고함을 질렀더니, 이 사람이 테이블 밑에 쏙 들어가더라고. 고리대금업자는 얼굴이 밝혀지면 큰 약점이 되거든. 쏙 들어가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신 감독, 앉아, 앉아” 그러더라고. 그러더니 슬슬슬슬 피해서 없어졌어요.(웃음) 이게 충무로에서 화제가 됐어요. 충무로에 소문이 난 거야. 그때 배우협회 회장도 할 땐데, ‘뱀대가리가 신성일이 돈 못 받았다'는 소문이 났어요. 고리대금업자가 돈 떼였다고 하면, 이건 문 닫아야 돼요.” --- 「6장 누군가 보고 있다, 똑바로 걸어야지, 나는 신성일이다-충무로 고리대금업자 뱀대가리와의 한판 승부」 중에서
“지 - 1970년대 들어서 한국 영화계도 침체했고, 선생님도 부진했는데요. 그러다가 스타로서의 존재를 증명했던 것이 1974년 작품 「별들의 고향」 아닙니까?
신 - 영화 출연 편수가 확 줄어버렸지요. 「별들의 고향」 하고 1977년 「겨울여자」로 명맥만 유지합니다. 개봉한 해마다 최대 관객을 동원했고, 계속 우리나라 흥행 기록을 다시 세웠어요. 그전까지 최대 흥행 기록은 「성춘향」이었는데, 그것을 1974년 「별들의 고향」이 넘어서고, 1977년에는 「겨울여자」가 넘어서죠.”
“우리 영화계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한계에 이르렀죠. 너무너무 시달림을 받았어요. 달리 시달린 것보다 분위기에 짓눌린 거죠. 정치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시대잖아요. [중략] 분위기가 일반 가정에도 알게 모르게 다 침투해 들어갔어요. 그런 데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집단이 문화인, 예술인인 것 같습니다. 뭔가 답답한데 탈출구는 찾지 못하고, 영화 제작은 해야겠고… 그래서 건달 얘기, 김두한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팔도졸업생」 「1대1」 「할복」 이런 것이 다 액션물이거든. 검열에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등장인물 저희들끼리 싸우는 거지, 이념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작품들로 그럭저럭 끌고 가는 영화계였으니,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죠.” --- 「
7장 관객의 사랑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암울한 시대에 감염된 한국 영화계, 「겨울여자」 49만 관객 동원 그 이후」 중에서
“결정적으로 「배신」이라는 작품을 할 때 내가 마음을 표시했지. 연기지만 결정적인 표시를 거기서 한 거지. 호수 멀리서 보트를 타고 있는 장면인데, 거기서 진짜 키스를 해버린 겁니다. 청평호수에서 촬영한 겁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시간이 지나고, 1964년 「동백아가씨」를 찍으러 갔다가 호텔 창문을 통해 엄앵란 씨 방에 침입한 것이 결정적이었지.(웃음)”
“사실 결혼식을 50주년에 하자고 했더니, 엄 여사가 ‘50주년에는 내가 너무 늙을 것 같으니까 40주년에 하자. 10년 후를 어떻게 아느냐?'고 해서 서둘러서 했어요. [중략] 요즘 만혼이라고 나이 40줄에 결혼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러면 결혼 50주년을 맞으려면 90줄이 되어야 한다고. 결혼 50주년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금혼식이라는 것은, 내외가 살고 있다면 기념비적인 행사예요. 그때까지 별 사고 없이 살아 있다면 당연히 해야죠.” --- 「8장 나를 말하다, 내 사랑을 말하다-엄앵란, 그리고 여인」 중에서
“1960년대가 영화의 황금기라는 것은 아주 취약하고, 열악하고, 검열이 엄격한 속에서 일을 해온 데 대해, 우리는 영화인으로서의 정신력을 평가받고 싶다는 겁니다. [중략] 우리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세상, ‘잘살아보세’ ‘새마을 운동을 항시 영화 속에 주입시켜라’ 하는 그런 시대에 영화를 했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열을 받으며 영화를 해온 거란 말입니다. [중략] 요즘 영화인들하고 우리를 단순 비교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지요. 동시녹음도 못하고, 수작업 하듯이 작업했고, 필름에도 너무너무 고가의 특별소비세가 붙어 있었단 말입니다. 1시간 45분짜리 영화 한 편을 기준으로 하면 필름이 평균 1만 자 이내면 되는데, 만약 누가 필름 3만 자를 쓰면, 많이 쓴다고 해서 제작자들이 ‘이 감독은 다시 쓰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그런 시대에 영화를 만든 겁니다.”
“나는 제작을 하면서 충무로에 번 것을 환원했어요. 스태프, 영화배우, 스타라는 사람들이 겨우 자장면이나 먹어가며 영화 작업을 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중략] ‘이것으로 부족하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성일가라는 한옥만 보는 것으로는 재미가 없다, 온 사람들한테 재미를 주자, 문화의식을 높혀주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영화박물관을 지으려는 거지요.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는 유감없는 일생을 마치는 영화인이 되는 거죠. 이룰 것을 이룬 뒤, 세상을 떠날 때는 화장한 다음 수목장을 하려고 해요. 그것으로 내 인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지 - 정치하신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신 - 없어요. 내가 하고 싶었다고. 앞서 얘기했듯이 여의도 쪽으로 지나가다보면 국회의사당이 보이잖아요. ‘나도 저기 한번 들어가 봐야지’ 하는 생각을 늘 했는데, 들어갔다 나왔으니 유감없어요. 내가 하고자 했던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빈 공간이 없어요. 다 차버렸어. 박물관만 완공되면 더 바랄 게 없지. 이 나이에 뭘 또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건 욕심이지.”
--- 「9장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다-낭만적 리얼리스트의 낮은 목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