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추위로 뒤덮인 광활한 광야를 서늘한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숨죽이게 하는 엄숙한 백야(白夜). 그 시리고 푸른 밤 속에 한 소년이 서 있다. 달빛이 가루로 부서져 내린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백금발에 뚜렷한 얼굴 윤곽. 양옆으로 길고 시원하게 뻗은 날카로운 인상의 두 눈에는 드넓은 바다와 같은 쪽빛의 눈동자를 고요히 품고서.
‘……그다!’
악몽에 취해 허우적거리다 잠에서 깬 해나는 어렴풋이 보이는 낯선 인영에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잠시, 불행하게도 그를 기억해내고 말았다. 수개월 전 따스했던 체온과 정반대의 한기를 내뿜으며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진흙 속으로 저를 던져버렸던 사람.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을 만큼 메말랐던 그 눈빛이 떠올라 해나는 신경 줄이 팽팽히 곤두서 올랐다.
그때였을 것이다. 불현듯 그에게서 낮고도 간결한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 것이.
“이름.”
“…….”
이 나라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달, 특유의 영민함으로 이곳의 언어를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었지만, 한껏 예민해져 있던 해나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미처 입술을 떼지 못했다.
느릿한 반응이 못마땅했는지 그에게서 한층 냉랭하고 으스스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네, 이름.”
“해나…… 입니다.”
“애나?”
“해, 나.”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라.”
짧고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칼만큼 소년은 표정도, 말투도, 목소리도 뾰족하게 각이 서 있었다. 마치 기합이 바짝 든 숙련된 군인을 보고 있는 것처럼.
“따라와.”
이어서 들려온 그의 명에 해나는 겁에 질리기보다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살벌함의 수위로 보았을 때 앞으로 벌어질 일이 평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해나는 긴장으로 빳빳이 굳어버린 몸을 움직여 거침없이 방을 나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얹혀사는 주제에 하도 과분한 대접을 받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일까?
복도를 걸으며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지만 소년과 똑같은 눈매를 가진 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밤낮으로 별궁에 들러 몸 상태를 확인하고 말동무가 되어주시는 이 나라의 국왕 전하. 그렇게 다정하신 분에게 저토록 감정이 말라버린 아드님이 계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권위와 거침없는 행동을 지켜보며 해나는 어느새 확신하고 있었다.
칼 프레데릭.
그는 북유럽의 강대국, 베르덴 왕실의 유일한 적통이자 후계자, 프린스 칼 프레데릭일 것이다.
감청색의 안료가 투명한 물속으로 사르륵 스민 것처럼 청아한 빛깔을 띠는 밤. 그 속을 걸으며 해나는 낯선 나라, 낯선 세상에 와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다.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걷기만 하는 소년의 뒷모습을 해나는 물끄러미 보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각, 거의 초면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나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분고분, 침착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곳에서 해나는 절대 약자에 불과하였으므로.
긴 복도와 여러 개의 홀을 가로질러 어느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그는 맨 꼭대기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해나도 두 계단 정도를 남겨놓고 그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작년 가을, 네가 처음으로 발견된 그곳을 일명 왕의 숲이라 한다.”
해나의 언어 실력을 의식한 것인지 그는 천천히 명확한 발음으로 입을 떼었다.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왕실 소유의 숲. 병사들에게 발각되었다면 너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을 것이다.”
“…….”
“무사히 그 숲을 빠져나갔다 해도 얼어 죽었거나, 청국인을 신기해하는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었거나, 포주에게 넘겨져 사창가로 팔려갔을 테지.”
감정 없는 그의 음성이, 건조한 표정이, 메마른 눈빛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괴기스럽게 하였다. 오밤중에 사람을 불러내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하고 있다니. 그래서 동정한다는 것인지, 가소롭다는 것인지, 마땅히 내쳐져야 한다는 것인지 그 저의를 알 수가 없다.
“천운으로 전하께 거두어진 너는 운이 좋았다 생각하겠지. 목숨을 구하고 별궁의 주인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네 운이, 과연 어디까지일까?”
“…….”
“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게 행운일까, 불행일까?”
“저는…….”
“돌아가서.”
추궁과도 같은 물음에 해나가 답을 하려 하자 소년은 칼같이 대답을 끊었다.
“네 거처로 돌아가 생각해보라.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 예쁜 옷을 입은 사람들,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이곳. 이곳이 네게, 천국일지 혹은 지옥일지.”
쓸데없이 예민해진 탓일까. 해나의 귀에 그의 말은 다른 식으로 들렸다. ‘이곳은 천국이다. 그러나 내가 있는 한 이곳은 네게 영원한 지옥이 될 것이다.’라고.
낯선 곳에 떨어져 눈치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지만 이런 식의 노골적인 적대감은 실로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해나는 시키는 대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일지 거처로 돌아가 생각해볼 참이었다.
바로 그때,
“엇!”
등 뒤로 거센 손길이 내리쳐 해나를 모질게 떠밀었다. 그대로 고꾸라진 소녀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꽝! 이마가 계단에 사정없이 부딪치고 상체와 하체 곳곳이 막무가내로 딱딱한 물체와 마찰을 일으키며 튕기듯이, 매우 빠른 속도로 데굴데굴, 해나는 차가운 대리석 계단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닥끝까지 정신없이 굴렀다.
“으윽…….”
싸늘한 바닥 위로 처참하게 널브러진 소녀에게서 가냘픈 신음이 새어나왔다. 삽시간에 온몸을 뒤덮은 끔찍한 통증과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이 고통스럽다. 너덜너덜해진 사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해나의 의식은 뿌옇게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건,
뚜벅, 뚜벅, 뚜벅.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소년의 무심한 얼굴.
해나의 인생에 뼈아픈 고통과 절정의 행복을 동시에 선사한 절대 강자, 칼 프레데릭과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