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세상 모든 남녀에게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연애상대는 그 바다에 찾아오는 물고기들인 것이다. 연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와 속도 등 바다가 가진 조건과 물고기의 종류가 맞아야 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나의 바다는 어떤 바다일까?’
“산티아고에 괜찮은 사람이 많아요.”라는 그 다정한 목소리는 어느덧 왜곡되어 내 귀에 이렇게 들리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에 물이 좋아요.”
실제로 혼자 여행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안.생.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에 에단 호크 같은 남자가 없다. 그리고 이쪽도 줄리 델피가 아니다. 정확히는 썸이 생길 기회가 없는 게 아니고 내 타입이 나타날 확률이 드문 거다. 예를 들면 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흰 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성이 좋은데, 현실은 늘어난 티셔츠에 북실북실 가슴털이 삐져나온 잭 블랙 같은 남자가 말을 거는 식이다.
그럼에도 남자를 찾아 산티아고로 떠나기로 했다. 사실 인연을 만나는지 못 만나는지가 중요하진 않았다. 찾지 못한다고 해도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자가) 없는데 잃을 건 또 뭐가 있겠는가.
“빌을 사랑하고 있지만, 결혼을 하면 미혼일 때 누리고 있는 생활들을 포기해야 하겠지. 생활터전이 바뀌는 문제도 있고. 그래서 망설여왔어. 그럼에도 하나하나 계산을 해보니 확신이 들었어. 우리가 함께 하면 서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을 거야.”
“신념을 가지고 기다려봐.” 당당한 그 태도에 더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결국 애써 없는 신념을 끌어 모아 차분히 기다렸다. 드디어 5시. 마리아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내 앞에 나타났다. “봐, 신념을 가지니까 침대가 생겼지?”
“신과 친구 같다는 건 어떤 거죠?” “뭐, 지금이랑 비슷해. 내가 좀 천천히 가도 저 친구가 기다려주고, 물론 잔소리를 좀 하긴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또 나란히 걷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믿는 거지, 항상 함께라는 것을.”
“하지만 오해하지 마. 신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신이 아냐. 일생을 거쳐서 내가 이거 하나 깨달았지. 내가 젊을 때 저지른 수많은 실수는 그 착각에서 비롯됐거든.”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천 년 동안 쓰여진 이야기와 새 이야기 사이를 걷는다는 의미이며, 그 이야기의 깊이 속에서 자신만의 서사시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이 길의 매력은 시대를 뛰어넘는 풍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에게 결혼한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독일은 결혼하는 편이 세제혜택이 많거든. 둘이 싱글로 빠져나가는 돈을 계산해보니까 어마어마하더라고. 그 돈이 아까워서 결혼했어.”
“차라리 두 사람의 장래에 확실히 플러스되는 요인이 있는지 제도적 장점을 찾아보는 건 어때? 장점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결심이 쉬워지지 않겠어?”
토산토스에서의 밤, 발의 통증이 심해졌다. 호스피탈레로 호세에게 찾아가자 그는 미지근한 소금물에 내 발을 30분 정도 담그고 있도록 했다. 모두가 자러가고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건을 가져와 내 발을 닦아주고, 정성껏 소독을 해주었다. 이제 끝났나 싶었는데 그는 어디에선가 스티로폼을 하나 가져왔다. 그 스티로폼을 내 발만큼 재단해 자른 후 가장 물집이 심한 발 앞꿈치 부분을 도려냈다. 그리고는 완성된 깔창을 반창고를 이용해 내 발에 딱 붙여줬다. 아픈 부분에 체중이 덜 실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녀에게 전 남자 친구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지난 1년 동안 연애는 왜 못했는지, 어쩌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연애나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장황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길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 그렇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것 봐. 그러니까 네가 특별한 거야. 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그걸 향해 나아가잖아.”
“왜 결혼을 안 했냐?”라는 질문 앞에 나는 “어쩌다보니 못했어요, 어쩌죠?” 하고 못나게 웃어버리곤 했다.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불쌍하게 보여야 공격당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이게 내가 터득한 생존법이었다. 외눈박이 세상에 양눈박이가 살든, 양눈박이 세상에 외눈박이가 살든 어쨌든 내가 사는 세상에선 다른 건 틀린 것이기에.
아이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당당히 말하는 거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인생은 괜찮았다.”고.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기 전, 그녀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해줬다. “다른 사람들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삶은 누구에게도 같을 수 없거든.”
“내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이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릴리와 아이는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남자 친구의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과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건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90%는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거 같아.”
“인생을 미로라고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새라고 생각해봐. 네가 고민한 내용은 위에서 바라봤을 때는 ‘작은 헤맴’일 뿐이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원래 어떤 사람이냐는 거야. 어차피 너라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지금의 너의 마음, 너의 정신, 너의 순수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네가 향하는 길은 하나일 거야.”
“대학에서는 내가 똥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 살아보니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적은 돈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일단 살기 위해 많은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부터 버리게 되었지.”
“인간이 사랑을 느끼는 생명체인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일 거야. 인류는 서로 사랑을 하고 협력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을 더욱 잘 느끼도록 진화된 거지.”
“순례길 초반에는 사람들이 진짜 죽을상을 하고 걸어요.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지?’라는 표정으로요. 하지만 중간이 넘어가면서부터 사람들 얼굴은 평화로워지기 시작해요. 낙오자가 많은지 인원수도 많이 줄어요. 그리고 목적지를 앞둔 지금은 사람들 표정이….” “환희에 넘치나요?” “아뇨, 독기에 넘쳐요. 눈빛이 형형한 게….”
남자 친구의 청혼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릴리는 미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남자 친구와 그의 아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고 했다. 기뻐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답을 찾았다고 한다. 이미 이들을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고. 그렇게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로 긴 메시지는 끝을 맺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맸지만 그 파랑새는 결국 집에 있었다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이야기처럼 릴리는 긴 순례를 하고 집에 도착한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았다.
묵시아에서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을 때였다. 창밖에 무지개가 떴다. 다들 반가워하며 카메라로 찍고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응?” “저 무지개를 봐. 좋은 징조 같지 않아? 난 우리 사이가 잘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행복이라는 말에 강박을 느낄 필요 없어. 행복을 찾다가 인생 끝날 일 있어? 그냥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순간순간의 기쁨에 집중해. 그리고 그때 네가 가슴 떨림을 느낀다면 너에겐 신의 심장이 있다는 거야. 그 신의 심장을 뛰게 해봐. 그걸 놓치지 않는 삶이 진짜 삶이야.”
“네가 길을 헤매지 않도록, 내가 길을 잃었나 봐.” 그렇게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잃었다.
이 길의 가장 큰 매력은 마음껏 이기적일 수 있다는 거였다. 순례길에서는 800km만큼의 시간동안, 머리 아픈 현실을 내려놓고, 사랑인지 미움인지도 모를 인간관계도 내려놓고, 그저 단순한 삶을 살면서,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보내던 여름방학처럼, 매일을 나만 생각하며 지내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