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저는 낙원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낙원은 행복만 가득 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낙원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낙원이란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삶과 죽음은 등이 붙어 있는 일란성 쌍둥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분리된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산다는 일은 곧 죽는 일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p.35
저는 지금 큰딸의 기억을 등에 업고, 어느새 훌쩍 커서 친구가 된 작은딸의 손을 잡고 남은 생을 걸어갑니다. 큰딸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진 짐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꽃짐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래야 하겠지요. 고단하고 무겁기만 했던 한평생의 어떤 짐도 마침내는 꽃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p.37
그래요. 우리가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생의 빛깔도 달라집니다.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해와 같은 밝음을 품고 있으면 삶이 밝아지고, 어둠을 품고 있으면 캄캄해집니다.
오늘 밤 저는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경험, 그 안에서 느낀 섬세하고 격렬하고 애틋한 무엇들이 환한 빛을 발하기를,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다른 생에 따스하게 스며들어 아름다운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밤은 ‘다른 밝음’입니다. --- p.40
나무는 가을이 되면 ‘떨켜’라는 세포를 작동시켜 잎을 강제로 떨구어냅니다. 잎사귀를 떨구어 잎으로 가는 물길을 봉해 수분을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한 나무는 그런 상태에서 겨울잠에 들어가는데, 몸 안에 얼음 세포라고 불리는 ‘얼음물’을 품고 있다지요. 너무도 놀라운 일은 이 차가운 얼음물이 다른 세포가 얼어 죽지 않도록 단열, 보온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얼음물을 녹여, 가지 끝마다 수분을 전해주지요. …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떨켜와 얼음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만약 어느 날, 우리에게 겨울이 찾아온다면 나무를 스승 삼아 꿋꿋이 견뎌야 합니다. 분명 새봄이 찾아올 테니까요. --- pp.60~61
산풀 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달빛 젖은 자두나무 그늘을 바라봅니다. 거기 잠든 이름 모를 산새를 생각하며, 늘 내리는 결론을 다시 한 번 또 내립니다. 표현하기조차 힘든 비극적인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들이 결코 작은 게 아니라고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휘황한 봄밤을 100%, 아니 1000% 즐기자고 다짐합니다. --- p.97
저는 원래 느린 사람입니다.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에서 모노로 나오는 흘러간 옛 노래의 느린 가락에 몸을 실으니 참 편합니다. 그건 추억이 깃든 노래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느린 멜로디와 다그치지 않는 가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노래를 들으며 당연한 결심을 새삼스레 합니다. “모두들 뛰어도 나는 걸어갈 테다. 생에서 만나고 보는 모든 것들을 즐기며 천천히 살아갈 테다” 하고요. --- pp.104~105
편지를 쓴다는 일은 그래서 단순히 소식만 전하는 게 아닙니다. 쓰고 부치고 다시 답장을 받는 긴 시간 동안, 가슴속에 달무리처럼 조용히 커져가는 어떤 예쁜 것, 가치를 섣불리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만들지요. --- p.115
이 시대는 우리가 침착해질 기회를 잃게 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가는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이것이 진정 내가 바라던 삶인가, 생각할 틈을 없애버렸습니다. 독서는 우리를 침착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오랜 독서 생활을 하신 분의 얼굴에서는 조용하고 단단한 힘이 배어나오는 걸 느낍니다. --- p.118
나이가 들면 세상에 대한 관심의 내용이나 방향이 달라집니다. 제 경우는 사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대신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들에게 점점 마음이 크고 깊게 열려가는 걸 느끼지요. 사람과 사는 모습이 다른 새나 벌레나 풀 같은 것들, 꼬물꼬물 작게 소리 내고 작게 움직이는, 그러나 터질 것 같은 생명력으로 가득차서 살아가는 그것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생명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경외심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 p.133
익중이를 다시 만난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찌 변했을까, 알아볼 수 있을까. 얼마나 흥분이 되던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지요. 익중이는 더했겠지요. 그리고 드디어 익중이가 제가 일하던 환경단체 사무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긴장을 억누르며 멈칫멈칫 들어설 때, 그리고 그 오랜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 넘어 중년의 음성으로 “선생님!” 하고 다시 저를 부를 때, 저는 보았습니다. 어린 소년에서 넉넉한 중년으로 넘어간 저의 ‘어린 제자’를. 그때의 놀라움과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 p.168
저는 이런 대단찮은 나눔과 ‘다시 쓰는’ 생활이 늘 조용하시기만 했던 제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은 참으로 미약하고 대단찮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한 사람의 힘은 큽니다. 추운 겨울날, 찾아온 걸인에게 소반의 먼지를 닦아 따뜻한 밥과 국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힘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셨겠지만,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힘이 부족한 저를 통해 제 딸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보니까요. --- pp.186~187
저는 지금 얼떨결에 그토록 선명히 찍힌 그 얼굴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와 있습니다. 끝 모를 생의 우물 속을 외롭게 들여다보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 색채를 버리고 적막한 선 하나로만 살아 있는 한 송이 꽃, 절대 고독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를 안다는 것은 아마 유한한 생 위에 위태롭게 떠 있는 인간을 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