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는 왕의 사윗감을 마치 왕비나 세자빈을 고르듯이 간택했다. 곧 혼인적령기에 해당하는 전국의 청년들을 금혼禁婚시킨 후 이들을 모조리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3차에 걸쳐 면담, 심사하여 간택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태종이 시행한 간택에서는 금혼령도 없었고 3차에 걸친 면담, 심사도 없었지만 여럿 중에서 고른다는 면에서 간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 왕의 사윗감을 3차 간택으로 결정하게 된 것은 태종이 정선공주의 부마를 간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24, 「1. 정선공주_태종의 딸 : 과부의 아들과 결혼한 공주」 중에서
경혜공주는 생모가 세자의 후궁이었을 때 태어났으므로 엄격히 따지면 공주가 아니라 현주縣主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본부인이 낳은 딸은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翁主, 세자의 본부인이 낳은 딸은 군주郡主, 후궁이 낳은 딸은 현주로 구별했다. 군주는 정2품, 현주는 정3품의 작위를 받도록 규정되었다. 군주나 현주는 보통 7세가 넘어야 작위를 받았으므로 경혜공주는 출생 직후에 아무런 작호 없이 그냥 동궁의 딸이란 뜻의 동궁녀東宮女로 불렸을 것이다. 경혜공주의 출생은 권 승휘에게 양원으로의 승진 이상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 p.50, 「2. 경혜공주_문종의 딸 : 나는 왕의 딸이다」 중에서
정명공주貞明公主는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의 딸이다. 그것도 11명이나 되는 선조의 딸들 중 유일한 공주다. 정명공주는 선조 36년(1603) 5월 19일에 정릉동 행궁에서 태어났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정릉동 행궁이나 선조 36년이라는 시점 모두 공주에게 불길하게 작용했다. 축복을 받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정명공주가 태어난 정릉동 행궁이라는 장소부터가 문제였다. 행궁이란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이었다. 정식 궁궐이 아닌 임시 궁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파란의 예고였다. 정릉동 행궁은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 처음으로 행궁으로 이용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겨우 보름 만인 동왕 25년(1592) 4월 29일 밤에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파천했다.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갔던 선조는 동왕 26년(1593) 10월 1일에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p.101, 「3. 정명공주_선조의 딸 : 공주로 죽고 싶소」 중에서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자신의 양녀養女로 삼고 공주에 봉작하였다. 금림군은 굳이 촌수로 따지면 효종의 10촌 할아버지뻘이다. 금림군은 성종의 4대 후손이고, 효종은 성종의 6대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림군의 딸은 효종에게 11촌 고모뻘이다. 그럼에도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물론 도르곤의 배우자로 보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공주로 봉작하고 그 봉작명을 의순義順이라 하였다. 나라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대의에 순종했음'을 높이 기리자는 의미였다. 의순공주義順公主란 봉작명에는 금림군과 의순공주에 대한 효종의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담겨 있다. 4월 22일, 의순공주는 도르곤에게 시집가기 위해 한양을 떠나 청나라로 출발했다. --- p.211, 「5. 의순공주_효종의 딸 : 급조된 공주의 비극적 운명」 중에서
일제는 덕혜옹주에게 완전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덕혜옹주는 유치원 때 일본인 보모에게서 일본식 교육을 받은 뒤라 일본식 교육에 익숙했다. 일제는 덕혜옹주에게 아예 일본식 초등교육을 시켜 옹주를 일본인화하고자 하였다. 덕혜옹주는 1921년 4월 1일에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 입학했다. 덕혜옹주는 2학년 3조組에 편입했다고 하는데, 나이 때문에 2학년으로 편입했을 것이다. 덕혜옹주는 '게다'를 신고 '하오리'를 걸친 채 검은 마차를 타고 통학하였으며, 학교가 파한 후에는 창덕궁에 돌아와 “윤황후 마마. 오늘 학교에서 배운 노래 들려 드리려 합니다”하고는 '호타루[螢] 찬가' 등을 부르곤 했다고 한다.
--- p,329, 「7. 덕혜옹주_고종의 딸 : 조선과 함께 지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