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권과 사회의 수준
서울도 그렇고, 대구도 그렇고, 중소도시는 더 하다. 이면도로에 들어서면 사람이 다니는 보도는 아예 없게 마련이고, 2차선 양쪽에 불법 주정차한 차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사람과 차가 엉켜, 걸어 다니기 힘들다. 한 번은 골목길을 가다가 최고급 벤츠 차에 치일 뻔 했는데, 내가 운전자에게 조심해 운전하라고 주의를 주었더니, 오히려 40대 운전자는 차창을 열며“노인네가 죽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 걸어라”며 내게 호통을 쳤다. 노인네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생명을 경시하는 그의 말투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겪은 이후로 대로변 횡단보도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신호를 위반하거나, 좌우간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차들 중 시내버스와 택시 다음으로 외제 승용차가 많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유럽에서 살 때를 되돌아보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일수록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예의도 바른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반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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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보행권이 무시되는 나라이니 국도와 지방 도로에 보행자를위한 공간이 있을 리 없다. 시골 길에서 사람들이 차도의 가장자리를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연간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의 수가 2천 4백 명 내외인데, 이 중 70.9%가 시골 길과 중소도시에서 죽었다. 대부분이 노인과 어린이 등 보행자들이다.
녹색도시연구소가 얼마 전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의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3배에 달하는것으로 집계되었다. 한국은 10만 명 당 5.28명으로 가장 많고, 네덜란드는 0.51명으로 가장 적다.
현업에 종사할 때 종종 방한해 만났던 한 싱가포르 수입상의 말이 상기된다. “교통위반을 단속하는 경찰관에게 대들 정도로 질서가 문란하고, 자동차가 사람을 경시하는 나라치고, 경제가 엉망이지 않은 나라가없는데, 한국만은 예외라는 것이 희한하다”는 그 말이다. 지금 되씹어 보면, 교통법규의 준수가 경제와 사회규범의 기본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의식과 제도가 이대로 간다면, 한국경제의 혼란과 정체는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들려 씁쓸하다. --- p.15
권위와 책임
책임이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의 권위는 그만큼 작아진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권위는 한 순간에 무너지게 마련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권위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권위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며, 권위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책임 또한 헛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20여 년 전 우리가 군사독재의 압제 하에서 민주주의를 갈구할 때, 민주화만 달성되면‘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국민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세상’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는커녕 부정과 비리가 여전히 만연하고, 국민이 통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도 투표 당일의 이야기일 뿐 실체가 없는 수사에 불과하다는데 좌절한다. 좌절 속에서나마 투표 당일 책임을 다했느냐는 반성도 없이 유권자들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권위마저 망가뜨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우리는 절차적 민주화에는 성공했으나, 의식의 민주화에는 실패한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다.‘의식의 민주화’의 핵심은 구성원들의 도덕성에 기반을 둔 책임의식과 행동이다. 우선 만인의 정당한 요구 사항들을 효율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대통령을 비롯한 선출직 지도자를 선택하는 유권자로서의 책임의식이 사회 저변에 퍼져 나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선출되고자 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낡은 지역정서나 허황된 이념에 기대어 한 표를 간청하지 못하게 된다.
민주사회에서의 권위란 권력의 명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식견과 솔선수범과 성취를 통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21세기 지식사회를 예언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권위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그의 뛰어난 지식으로부터 표출되듯이, 정치 지도자의 권위도 국리민복을 달성코자 하는 투철한 책임감과 원대한 비전에서 생성된다. 20세기 유럽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 평가받는 드골의 권위는‘위대한 프랑스의 정신’과‘대서양 연안에서 우랄까지의 유럽 통합’에 대한 불굴의 비전으로 쌓아 올린 금자탑이다. --- p.99
서비스의 선택이 사회를 바꾼다
길가에서 택시를 탈 때마다 요금을 두 배, 아니 세 배로 올려준다 하더라도 한 달이 안 돼 서비스는 도로 아미타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전기사 입장에서는 자기 택시에 언제 다시 탈지 모르는 손님, 어쩌면 택시기사를 그만 둘 때까지 영원히 다시 타지 않을지도 모르는 손님에게 정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
요즘 서울에서 결혼식에 갈 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기가 불편해택시를 타는? 식장의 약도를 건네주어도 그곳을 제대로 찾아가 내려주는 택시를 보지 못했다. 하물며 무턱대고 장소만 말했다가는 정신 나간손님 대접을 받는다. 아마 선진국의 경우처럼 어느 동네의 몇 번지 주택 앞까지 데려가 달라고 한다면 미친 손님으로 취급되어 병원 쪽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택시기사들은 짐이 있을 때 그것을 들어 실어주지도 않을뿐더러 차안에서는 제 입맛에 맞는 라디오의 프로그램만 틀어댄다. 한밤중이나 이른 아침에는 과속하지 말라는 손님의 요구를 묵살한 채 마구 달리기 일쑤다.
백화점에서 소비자가 물건을 고르고 골라 사는 것처럼 택시도 손님이 그렇게 선택하여 타게 하는 제도가 도입되지 않고는 택시업의 서비스는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요금을 올려봐야 허사가 된다. 선진국에서 콜 택시제가 일반화된 것은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가정과 직장과 상점 등 건물 안에서 택시를 선택하여 부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택시를 탈 수 없다. 공항과 기차 및 버스 정거장 같은 공공장소에 설치돼 있는 택시 승강장이 아니고서는 길가에서 우리처럼 택시를 잡아 탈 수 없는 교통 시스템이다. 집에서 부르는 택시의 서비스가 엉망이면 그 회사 택시는 다시 부르지 않게 된다. 서비스가 나쁜 택시 회사는 망하게 돼 있어 서비스 경쟁은 치열해지게 마련이다. 내 생각 같아서는 길거리에서 마구잡이식으로 택시를 잡아타고자 하는 손님에게는 콜 요금의 곱절로 비싸게 받도록 허용해야 한다. 언제 다시 탈지 모르는 손님에게는 그렇게 받아도 괜찮다. 이런 제도를 도입해서라도 소비자들의 선택권 행사 인식을 일깨워 줘야 한국의 서비스산업이 발전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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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둘 이상의 정부를 운영할 수는 없으므로 공공 서비스의 경쟁과 선택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지자체 장과 지역 의원들을 선출하고 있지 않은가? 선거가 곧 공공 서비스를 소비하는 주민들의 선택인 것이다. 대통령이든 지자체 장이든 지역정서나 허황된 것에 얽매어 선택을 하다 보면, 택시를 탈 때보다도 더 고약한 서비스를 받게 된다. 누가 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고통 없는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가를 꼼꼼히 따져 투표하지 않는 한 오늘의 사회현실은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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