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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 소나무

세한 소나무

[ 양장 ] 정채봉 전집 중단편-03이동
정채봉 글 / 김동성 그림 | 샘터 | 2009년 05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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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325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46416390
ISBN10 8946416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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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벗에게

이 세상살이가 팍팍하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혼자서 입술을 물고 참아낼 때도 있었습니다만 당신 나이 스무 살에 돌아가신 어머니 산소 앞에 가서 마흔이 넘은 나이로 울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죽어버리고 싶다.”고 중얼거린 때도 있었습니다. “이래도 용서합니까?” 하고 신께 감히 대들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하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방황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닦고 일어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돌리고 찬물을 마셨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우러르며 돌아왔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저도 으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꾸 몸을 뒤채다가 빗방울 한 낱, 실바람 한 줄기에도 벌떡벌떡 일어나게 되지요. 그럴 때 저는 가슴속의 유년통장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조금 인출하곤 하였습니다.
고향 산 아래에 작은 못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못가에는 큰 벚나무가 두 그루 있었습니다. 벚나무의 벚꽃이 활짝 핀 사월의 못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못 안에 푸른 청보리밭 자락이 비춰들고 있고 거기에 벚꽃 그늘 드리워진 환한 그 세상을. 저한테 그 풍경이 떠오르면 아득한 바다에 목선 떠오는 것 같은 평화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또 한 풍경을 인출합니다.
두루미를 쫓아 겅중겅중 걷던 논두렁길에서였지요. 훌쩍 날아버리면 될 것을 어린 나한테 제 걸음걸이 연습을 시키려고 그랬던지 꼭 그만한 간격을 두고 겅중겅중 걸어가던 두루미. 그 두루미가 문득 멈춰 서서 목을 빼어 보던 재 너머. 거기에는 무지개가 떠 있었지요.
무지개를 두루미와 함께 바라보던 날의 생각이 나의 수면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만 어떤 날에든 피천득 선생님의 시 ‘꽃씨와 도둑’을 수면제로 삼기도 합니다.

마당에는 꽃이 / 많이 피었구나 // 방에는 / 책들만 있구나 // 가을에 와서 / 꽃씨나 가져 가야지

정말 꽃잠이 올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잠 못 이루는 그대에게 권합니다. 근심 걱정 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감동이 배인 날을 떠올려 보라고. 그것은 틀림없이 위안을 줄 것이며 안식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 생각이 미치신다면 이 책의 동화들을 부족하나마 평화정제로 써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살아볼 만한 가치 있는 세상이라는 것과 행복 예감을 주고자 하여 이 작품집을 묶어 내게 되었으니까요. 정말이지 그대에게 날마다 좋은 날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993년 12월
정채봉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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