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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6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79쪽 | 228g | 128*205*20mm
ISBN13 9788932019642
ISBN10 8932019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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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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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너는 갇혀 있다.
너만 바라볼 수 있는 너의 거울 안에, 너는 갇혀 있다.
네가 잠드는 집과 출근하는 회사, 네가 말하는 언어의 벽들이 너를 감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감옥 안에서 너는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아무도 너를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조차도 네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거의 포박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 모국어의 감옥, 자각할 수조차 없는 거울의 감옥!
새 봄이 오면 새 풀들이 자란다. 너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새로운 언어들이 거품처럼 일어난다.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거품은 희망인가? 비눗방울들은 터지고 사라진다.
새파란 목장에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지 못해 야윈다. 풀들이 말한다. 군데군데 흰 꽃들, 손 흔드는 언어들. 소들은 먹는다. 말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되새긴다. 네 통화 방식으로는 소들이 더 이상 파릇파릇한 초록 귀에 속삭일 수 없다.
언어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부랑자들의, 불쌍한 사람들의, 포기하는 사람들의 언어. 네게서 자라나는 언어들은 얼기설기 얽힌 가시철조망, 강철프레스 같은 세계가 골통을 압박하듯 너의 생활 반경을 옥죈다. 태풍과 어울리는 기차.
네 주위에는 너를 발견하는 눈이 없고, 너 또한 너를 바라보는 시선의 독방에 잠겨 근심과 피로를 녹여 없앤다. ─좁고 깊은 한없이 꺼져드는 목구멍이여! 시야에서 아득해지는 길고긴 기찻길이여!
너는 더 이상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너는 목줄에 묶인 원숭이인데, 거울에 비친 너를 보는 너의 눈동자는 사라져버릴 허망한, 그러나 물리적인 빛의 환영을, 너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탐색한다.
구경꾼 가득한 서커스 천막이 네 거울 속에는 고독의 깊은 복도이다. ─아아, 어떤 언어도 한숨으로 번역되는 물결도 깊이도 없는 거울 표면이여! 얕은 미궁의 착란이여!

--- p.86


당신의 심장

돌은

눈으로
읽을 수 없는
당신
가슴에 빠트린

돌에 새긴
점자를 더듬어 읽어도
내용을 알 수 없는

손바닥에 감싸인
당신의
심장
읽지 않아도
두근거리는


--- p.112


손가락이 뜨겁다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 p.145


돌의 메아리-마이산

그녀는 각지고 둥그스름한 돌
앞에 선다. 그녀가 비치지 않는 돌
입 다물고 돌아서서 대화를 거부하는 돌
을 그녀는 바라본다, 돌
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까맣고 노랗고 희고 푸른 모래들은 얼마나
긴 세월과 수많은 비바람을 압축하여
저 거대한 말의 덩어리가 되었나.
반짝이다 사라지고 흐려지다 나타나는
먼지들, 입김들은 허공중에 떠도는 얼마나
강한 사랑의 접착력과 서로 교배하는 음절들의 악력으로
하나의 우뚝 선 음악이 되었나.
구름처럼 시시각각 모이고 흩어지는 우연의 형상,

거무튀튀하고 단단한 쪼개질 수 없는 차갑게 식은
별이면서 그 속에 한숨과 동굴과 오솔길과 생각과
미로와 감촉과 계곡과 우주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결빙된 태양의 재, 그녀 앞에 그녀가 비치지 않는 돌.

돌 앞에 서기 전에 그녀는 숲의
오솔길에서 벗어나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의 액자에 담긴 물에
도착했다. 파르스름한 영상들로 말을
건네는 물. 소리를 침몰시킨 풍경은,
고요가 수정으로 굳은, 거울에 비쳤다.
투영된 영상들의 긴장이 부드러운 물을
순식간에 투명한 금강석으로 만드는,
단어들을 고정시키는 문장 속 의미의 근육들
처럼 숲 속의 그 거울을 장식하는 낙엽들을
밟고 그녀가 물가에 섰을 때, 갑자기 물에
낯선 것이 솟아나고, 문장에 파문을 일으킨
말은 벌써 그녀 안에 어룽거렸다. 거울에 비친 건
그녀가 아닌 말의 영상이어서 매혹적으로 울렸다.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녀의 하얀 손이
거울을 깨뜨리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에 젖은 하얀 손이 돌
을 깎았다, 손이 물을
잡을 때까지. 돌부스러기들
이 하얀 손에 얼룩졌다, 돌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묻어날.
물에 젖은 하얀 손이 돌의 문장을
닦았다, 그녀가 비칠 때까지 문질
렀다, 돌이 그녀를 읽고, 그녀가 돌
에 비칠 수 있도록.

그러나 하얀 손이 물? 닿을 때 거울은 깨지고
영상은 흩어지고, 그림이 사라졌듯이, 불투명한
돌은 얇아져 반들반들한 거울이 되지 않고,
흐물흐물해져 수평의 물이 되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바람의 거대한 공허를 남기고.

그녀가 읽는 단어들이 나무로 우뚝하고
그녀가 읽는 문장들이 이끼로 미끄러운
그녀를 유혹하는 숲의 오솔길을 걷다가
그녀는 길을 가로막고 선 돌을 만났다.
각지고 둥그스름한 돌, 그녀는 돌을
펼쳤다, 문장 안에 그녀가 어룽거리며
비쳤다, 그녀 안에서 돌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울렸다.

숲 속의 밝은 햇빛이 눈동자에 머물렀다.
그녀가 물가에 섰을 때, 물에 비친 건
돌의 메아리, 검은 글자들이었다.
--- p.15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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