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년 전 여름날, 난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을 걷고 있었다. 고산병으로 머리 빠개지는 두통을 지닌 채 걷기도 하였고, 산 비를 맞으며 중국 친구들과 수다 떨며 흙탕길을 저벅저벅 걷기도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올여름, 난 산티아고를 향해서 흙 묻은 두 발로 또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 --- p. 10
언제 또 지금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겠냐고, 후회 없이 한번 살아보자고 마음을 먹고 지름신을 호출했다. --- p. 12
뭔가 얻겠지, 뭔가 배우겠지, 희망을 품는다. 아름다운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이 와 닿는다. 근처 식당을 찾아 열심히 배를 채운다. 레드 와인이 씁쓸하면서도 달다. 저녁값 18유로, 비싸다. 첫날이니까, 봐줬다. --- p. 20
“If you know how much I love you, you’d cry of joy(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쁨에 겨워 울게 될 것이다).” --- p. 26
오늘 순례의 발걸음을 뗀 각국의 순례자들은 ‘시작’이라는 이름 앞에 기뻐한다. 이렇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건만으로 감사하리다. 잠시나마 금일의 피로가 나의 몸에서 벗어난다. 내일 다시 힘차게 걸을 수 있겠다는 용기와 기운을 얻어간다. --- p. 29
둘 다 고마운 존재라서 녹이 슬 때까지 모자에 달고 다닌다. 나중에는 이 배지들이 정말 로고가 안 보일 정도로 빗물에 녹이 슬어 어딘가에서 버리게 된다. 고마운 존재, 그리운 존재와 함께 걸으면 좋다. --- p. 36
더 버려야 한다. 불필요한 건 더 버려야 한다. 근데, 무얼 버려야 하나. 지금 있는 아이템들도 정말 줄일 대로 줄인 건데 말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오후에 시내에서 햄, 샌드위치, 치즈, 빵, 땅콩 과자를 구입해서 가방을 더 채웠다는… 어깨는 더 무거운데, 먹을 것이 있기에, 마음은 든든해진다는 역설이다. 몸은 더 무거운데, 마음은 더 가벼운 건가? --- p. 42
이제 헤어질 시간.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고맙다고 이 친구는 말한다. 도운다는 게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시간과 장소를 같이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 p. 53
“한 나라에서 치열하게 밥그릇 싸움하는 것보다는,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무대를 세계로 넓히고, 더 많은 기회를 얻어 보는 게 훨씬 낫다. 우리 한국 음악, 공연 문화 이미 참 훌륭하니, 바깥으로 한 것 더 뽐내 보는 건 어떨까?”라 말하는데, 스텔라는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한다. “저 지금 소름 끼쳤어요.” --- p. 62
아마도 세레나도 이런 이유로 떠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까지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카미노 여행 중에는 그러려니 하는 일들이 많다. --- p. 76
작은 것이지만 내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미안하고, 우린 또 모른다. 중간중간 만나는 사람들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못 보게 될지도…. --- p. 95
다행이다. 육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은 점점 단순해진다. 더 단순해진다. 먹고, 걷고, 자고, 힘들어하고, 목말라하고…. 단순 욕구 갈망과 해소에 치우치다 보니 더더욱 머리를 비워나간다. 마음 같아서는 더 서둘러 비워나갔으면 좋겠건만, 그것도 과욕이리라. 단순한 모습이 낫다. 그게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둘러 단순해지고 싶은 과욕을 부린다. 과유불급. --- p. 100
다 같이 비틀즈 노래를 합창 시작한 뒤로는 와인이 다 사라졌다. 하하. 역시 가무는 음주와 동반되어야 제 맛인가 보다. 몇 곡 다 같이 흥겹게 노래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Imagine」 노래를 같이 부른다. 음악이 있어서 좋다! 와인이 있어서 좋다! 친구들이 있어서 좋다! 그리고 이곳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좋다! 카미노 여행… 이미 반한지 꽤 오래다. --- p. 128
“순례자의 길을 걷는 순례자분들 고생이 많습니다. 몸이 많이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가면서 고생이 많습니다. 그 가방의 무게도 무게지만, 여러분의 마음의 무게는 얼마나 더 무겁겠습니까? 저희들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절대로 무겁지 않습니다. 걸으시는 길 부담되지 마시라고, 조그마한 종이별을 만들어서 모든 분께 드립니다. 가방에 붙이셔도, 옷에 붙이셔도 좋습니다. 이 별을 볼 때마다 저희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곳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순례길을 기억해 주십시오. 몸 건강히 산티아고까지의 완주를 기도합니다.” 순례자들은 눈물을 터뜨린다. 내 눈시울도 가만히 있을 리야. 서로 얼싸안고, 위로해준다. 서글피 우는 친구들도 많다. 이렇게 하루하루 걸어가는 고행의 이유가 각자 다르고, 또한 어떤 이유에서 이곳으로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 같이 모두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같은 방향,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매일 매일 아픈 다리를 끌고, 아픈 마음을 꾹 부둥켜 잡고…. --- p. 163
아, 달콤, 냠냠… 맛있다. 열량 소비가 높은 이 카미노 기간에는 칼로리가 적어서 걱정이지, 높아서 걱정할 일은 없다. 우걱우걱 맛있게 씹어 먹었다. 또 맛있다. --- p. 177
그냥 이 순간, 여기, 이곳에 누워 있는 내가 좋다. 바람이 나의 애인이다. --- p. 179
이거 완전 꽃밭이다. 나에게 이 카드 게임은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 오늘따라 이 알베르게는 여초이다. 파울로 아저씨 말 안 듣고 여기 머물 길 잘했다. --- p. 185
석양빛에 말들이 평온히 풀을 뜯는다. 한 말 가족이 이 친구들과 좋은 대화를 나눈다. 나도 이 대화를 알아들을 듯 말 듯…. 취했군…. 도로에 눕는다. 노래를 같이 듣는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 산에서 부는 이 바람이 좋다. 이 친구들 오늘 밤에는 여기에서 누워서 저 별을 보고 싶단다. 이미 10시가 넘었는데도 세상은 환하고 별은 숨어 있다. 나도 오늘따라 별이 더 보고 싶다. 어여 나오렴…. --- p. 205
누군가의 물품임이 분명하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진들임이 분명하다. 여기까지 들고 와서 이곳에 두고 간 것이다. 그 고난 길에도 가슴 속에 꼭 품고 왔다가 이곳에 서글피 두고 가는 것이다. 멈추어서 명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세게 부는 아침 바람도, 나의 달궈진 가슴을 식힐 수는 없다. --- p. 207
바람이 분다. 이 바람, 난 기억한다. 여름날 해 질 녘 즈음에 부는 이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고 조금은 따뜻한, 나의 살갗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이 바람....내 머리가 기억하고 내 피부가 기억한다. 그 바람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격렬하게 안아 준다. --- p. 212
혼자 걸어왔다. 처음 여행 올 때부터 혼자였다. 새로운 친구들을 참 많이 만났지만, 난 그래도 계속 혼자 걸어 왔다. … 매 시각 변하는 자연 풍경이 신기했고, 이것저것 보고 느끼다 보니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혼자 걸어도 난 외롭지 않았다. 바람이 간간이 내게 다가와 이야기 걸어 주었고, 저 멀리 한국에서 지켜봐 주는 가족, 나를 응원해 주는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었다. --- p. 237
이론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이 헤어짐의 순간이다. 이 순간 굿바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친구들이다. 안녕 인사라도 말할 기회조차 있을까?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난 결국 오늘 아무에게도 굿바이 인사를 못 했다. 내일도, 모래도 난 못할 것이다. 용기가 부족하다. --- p. 242
어떤 친구는 대화는 나누진 않지만,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아쉬운 거다. 자리를 뜨기 아쉬운 거다.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운 거다. 난 한참 동안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한다. --- p. 255
오늘 몸의 통증은 맥주 3잔 째에서야 사라진다. 힘든 날은 와인이나 맥주를 안 마시려야 안 마실 수가 없다. 몸의 통증만 그러겠나. 마음의 통증은 맥주 3잔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 p. 267
걸으면서 우는 사람, 걷다 쉬면서 우는 사람, 도착해서 우는 사람. 조용히 눈물 흘리는 사람. 서글퍼 우는 사람. 환희에 차 우는 사람. 저 아래 가슴 속부터 차고 올라 우는 사람. 이날에는 눈물이 조용히 흐른다. --- p. 278
이곳으로 저를 부른 이유가 무언가요.
이곳으로 저를 걷게 한 이유가 무언가요.
이곳에서 저를 울게 한 이유가 무언가요.
이곳에서도 저를 아프게 한 이유가 무언가요…. --- p. 281
우리는 목적지가 같다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고, 서로에게 항상 따뜻한 미소를 띠어 보냈다. 이 산티아고 광장에서는 마음껏 울어도 된다. 우린 그래도 된다. --- p. 288
우리는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만남의 인사를 할 때도, 헤어짐의 인사를 할 때도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 p.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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