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는 누구나 가슴속에 꿈을 품었다.’ 그 꿈은 성공하고, 출세해서 타인의 위에서 군림하며 사는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남을 위해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던 기억이 더욱 많다. “나는 커서 의사가 되어 외제차를 타고, 빌딩을 올릴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나는 커서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고 싶습니다.” 라는 소박한 꿈을 우리는 꾸지 않았을까? ‘참여 민주주의’, ‘시민사회와의 소통’, ‘권위주의 청산’, ‘지역주의 타파’, ‘시대정신의 구현’ 등 굳이 어려운 단어로 노무현 대통령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라는 한 마디로 그의 철학을 표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이웃과 싸우지 말고, 더불어 살자.’는 그런 시시콜콜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노짱의 이야기로 풀어내긴 했지만, 이 글은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노짱을 주인공으로 가상의 시간과 공간, 인물 설정을 통해 소설의 형태로 전개 된다. 부족하나마 글을 통해 그가 말해온 가치들을 조금이나마 담고자 했다면 글 솜씨도 일천한 나의 욕심은 아닐는지……. 20년 지기, 나의 친구 도서출판 누토의 박철희 대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어릴 적에는 채변 검사라는 것이 있었다. 학교에서 하얀 채변 검사 봉투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비닐 봉투를 세트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볼일을 보고 나서 주로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 살짝 검사할 대상을 채취한 뒤 안전하게 밀봉해서 학교로 가져왔다. 채변검사 봉투는 보통 반장이 커다란 투명 봉투를 들고 다니면서 걷어 들이곤 했는데 아이들이 거기다 자신의 작은 채변검사 봉투를 넣었다. 실재로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데 반장이 커다란 투명 봉투를 들고 자기 옆으로 지나갈 때면 아이들은 코를 손으로 막으며 “아~ 똥 냄새~, 구려구려~”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도 4학년 때 반장을 하면서 채변검사 봉투를 걷은 기억이 있다. 그러면 수민이 녀석이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아~ 순진이 똥이 골인~” “아~ 진수 똥이 골인~”하면서 아이들을 한바탕 웃겼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말할 사건이 채변검사에 얽힌 수민이의 하이라이트이다. 당시에 채변검사 겉봉투에 보면 검사할 대상을 채취하는 요령이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바로 ‘밤톨만한 크기로 채취한다.’는 문구였다. 그런데 수민이 녀석은 밤톨의 크기를 입체적으로 계산해서 자신의 검사대상을 듬뿍 넣어온 것이었다. 즉 3D 개념을 채취에 적용했다. 거기다가 ‘꼭 밀봉하라’는 주의사항까지 지키지 않았으니 책이며, 도시락이며 잔뜩 넣어 온 그녀석의 가방속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될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기생충에 감염되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는데 그래서 채변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면 우리 모두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긴장을 하곤 했다. 우리 반 담임 너구리는 “자~ 이수진, 회충” “한영희, 회충” “그리고 봉하마을 수민이 회충, 십이지장충…….”하면서 아이들이 다 있는 앞에서 감염 대상자의 이름을 부르고 앞으로 나오게 했다. 그러면 주번이 일어나 교실 뒤편에 있는 큰 주전자를 들고 와서 약을 복용할 아이들을 위해 친절히 물을 따라 주고 지목된 아이들은 앞으로 나와 차례로 구충제를 먹었다. 수민이 녀석은 평소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는 편이라 항상 ‘회충’과 ‘십이지장충’ 등 2관왕 정도는 거뜬히 하였다. --- pp.30-32
선거를 하루 앞둔 날 오후, 세인이는 삶은 고구마를 한 바구니나 들고 선거 본부로 들어 왔다. 금방 삶아서 들고 와서 그런지 고구마 바구니에서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세인이는 고구마를 반으로 뚝 잘라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작년 가을 수민이와 세인이랑 함께 ‘삼총사의 집’에서 먹었던 고구마가 생각났다. 고구마를 반으로 탁 쪼개자 노란 속살이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마치 봄에 피는 민들레꽃처럼 노오란 고구마의 속살은 향기를 내 뿜으며 내 콧등을 찡하게 만들었다. 수민이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와 안묵노?” 세인이가 고구마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다. 배가 좀 불러서…….” “노짱, 내가 껍질 깠어. 이것 좀 먹어봐.”옆에서 보던 영숙이가 손수 깐 고구마를 다시 건넸다. “수민이 이 자식은 어디서 뭐한다고 코빼기도 안보이노. 자식이 보고 싶어 죽겠네.…….” 나는 참았던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며 말했다. 내 눈에 고인 눈물은 뚝뚝 떨어져 영숙이가 까준 노오란 고구마 속살을 적셨다. “뭐 잘한 게 있다고 안 들어오노, 빨리 들어 온나.” “수민아~”세인이가 갑자기 수민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세인이가 수민이를 부르는 쪽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 내렸다. “노짱, 미안하다…….”수민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나는 영숙이가 까준 고구마도 손에서 놓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민이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다~, 니가 미안한 거 한 개도 없다. 우리끼리 미안한 게 어디있노.” “잘 왔다. 고구마 무라. 진짜 잘 왔다.”나는 바구니에서 고무마를 새로 꺼내 딱하고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쪼갠 고구마의 반쪽을 수민이에게 건넸다. “사실은 내가 명준이네 양계장에서 닭서리를 하다가 선도부 아들한테 딱 걸렸다 아이가. 그래서 선도부 아들이 산수한테 말해서 경찰서에 집어넣어 뿐다고 그래서, 너무 겁나서 내가 선도부 아들 말 들을 수밖에 없었다.”수민이는 울먹이며 말을 이어 갔다. “됐다. 그만 얘기해라. 다 괜찮다. 나는 한 번도 수민이한테 섭섭하게 생각해 본적도 없고, 내 친구가 변했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라고 명준이나 산수나 회상이나 다 우리 친구 아이가….”나는 수민이를 달래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 명준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자기가 책임진다고 후보를 사퇴한기라. 아는 아들은 다 안다.”세인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세인아, 수민이가 이렇게 돌아 왔으면 다 된 기라. 인자 나는 전교회장 안 해도 여한이 없다. 다 괜찮아 진기라.”나는 수민이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고구마 이거 누구 집 고구마고, 그거 참 잘 삶았네, 노오란게 참 맛있네.…….”방송반 동재가 유쾌하게 한마디를 했다. “하, 하, 하, 하, 하, 하~,하~,하~,하~” 선거본부는 금세 웃음바다로 변했다.
--- pp.1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