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9년 3월, 서울에 입성하다
아버지가, 신앙처럼 또는 살과 피가 되는 토지 일부를 정리한 것은 나의 손을 잡고 금마 소학교를 다녀온 직후였다.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유산’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투자가 ‘교육’뿐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선택을 굳이 ‘교육열’이라고 일컫고 싶지는 않다. 그 시대에 있어 ‘교육’은 생존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내는 유일한 희망으로서의 생존.
아버지의 결심은 급물살을 탔다. 고향집과 농사일은 친척 분에게 맡기고는 서울 화동에 집을 얻어 같은 해 온 가족이 이사를 했다. 1939년 3월, 아버지와 어머니의 바람대로 드디어 나는 서울 수송 소학교에 입학했다. 6년 내리 우등생이었다. 보고 자란 게 늘 책 읽고 공부하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는지 습관처럼 책 읽고 공부하는 게 몸에 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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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5년 3월, 정신영을 만나다
그중 한 사람. 내 마음을 아버지로부터 움직이는 동사가 되도록 만든 결정적인 친구는 정신영이었다. 정주영 회장의 다섯 번째 동생. 처음 그는, 물에 떠 있는 탈바가지처럼 희멀건 얼굴로 내게 다가와 한 눈을 찡긋하며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야, 윤주원. 자기 자신 말고는 그 사람이 위선자란 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과연 성공한 인생일까, 아닐까?”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내 가슴은 덜컥거렸다. 기껏 이름 한 번 불러주었을 뿐인데.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물이 쏙 빠지도록 맘껏 웃어젖혔다. 그렇다. 서로를 알아보는 일은 여러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뜬금없는 질문 하나에 내밀함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했다. 훗날 10여년의 미국 유학생활을 접고 돌아온 나는, 아버지와 손잡고 걸었고, 친구 정신영과 함께 왁자지껄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던 고향 길을 제일 먼저 서성거렸다. 아무리 서성거려도 아버지도, 신영이도 나타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만 그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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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58년, 평생 동반자를 만나다
마음이 움찔, 했다. 맥박이 빨라졌다. 나에게 그런 감정이 생겨난 것이 놀랍고 적잖이 가슴이 부풀었다. “연락해도, 되죠?” 앞뒤도 가리지 않은 내 심장이 드디어 빠르게 종을 내리치며 그렇게 물었다.
내 말에 대답 대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다. 그런데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나는 그녀의 조심스런 끄덕임이 애절한 세레나데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후 오랫동안 그녀의 모습이 잔향처럼 내 마음 속을 푸르게 헤엄치게 되었다. 그녀를 가슴에만 담아두는 게 좋겠다, 본능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돈 안 드는 사치였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은 더러 나를 위험에 빠지게 했다. 그녀가 한 번씩 궁금해졌다. 아내, 하란수가 그녀이다.
---pp.66~67
#4. 1959년, 낯선 땅 캘리포니아 주에서 생긴 일
돌이켜 보니까, 관리인으로부터 전날까지의 작업과 다른 것에 대한 설명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집중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틀림없는. 떳떳이 잘못을 빌리라. 상황이 불리하다 하여 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정서적인 호소가 나을 것도 같았다. 피하는 것으로 나를 비롯한 같은 민족 모두를 싸잡아 비웃음거리로 만들어선 안 될 성싶었다. 내가 다시 농장을 찾았을 때는 태양이 어느덧 서 깊은 곳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함께 나타난 나를 보고 관리인이 움찔, 했다. 지금 뭐하자는 거야? 식의 표정에다 의중을 헤아리고자 하는, 모호함에 대한 반사작용이었을 터. 그런 관리인에게 나는 머리를 숙여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모호함에 움찔, 했던 그의 표정이 쫙 펴지면서 느리게 서너 번 고개가 끄덕거렸다. 용서하겠다는 긍정의 시그널이었다. 성공이었다. 그러니까, 진심이 통했던 것이다. 통했다, 다시 말하면 비겁한 변명보다 우선인 것은 진심이고, 실천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는 관리인의 눈빛 속에 비친 내가 그때만큼 좋아 보인 적이 없었다.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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