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씨는 중국 황제의 후궁으로 가 있는 고모,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 그리고 엄격한 교육으로 통제했던 아들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정치에 반영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합해져서 한씨의 권력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미 손자는 통제권에서 벗어났으며 남자 형제들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항상 든든하게 배후에서 지켜 주던 정희왕후 윤씨도 없었다. 게다가 정희왕후 윤씨에게는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한명회 같은 공신 세력들이 있었지만 한씨에게는 그러한 버팀목이 없었다. 오히려 권력을 가졌을 때 그들과 반목했을 뿐이었다.
누구도 한씨를 지지해 주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허망한 지지 기반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녀의 꿈은 절대 왕권 위에 군림하는 것이었지만 그 꿈은 신하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 제1장 「남성 권력에 무릎 꿇은 철의 여성, 소혜왕후 한씨」 중에서
윤씨에 대해 의로운 뜻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성종에게 충고한 신하는 소수였던 반면에, 대다수 그 문제를 거론한 신하들의 경우는 세자에 책봉될 연산군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성종은 더 큰 분노를 느꼈고, 조정 신하들이 감히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죄 없는 윤씨를 사사시켜 버렸던 것이다. 성종은 연산군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은 윤씨의 형제들과 신하들이 한패가 되어 혹시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윤씨의 오라버니들을 모조리 하옥시켜 버리고, 신하들과 어떤 연계를 맺었는지를 철저하게 밝혀내라며 옥사를 직접 진두지휘했던 것이다.
조정 신하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윤씨의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항상 누군가 권력을 넘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성종을 자극했다. 그리고 윤씨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윤씨는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윤씨의 죄목은 ‘투기’였지만 실제 죄목은 왕의 권력을 넘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 제2장 「왕의 권력을 넘보는 왕비는 죽어야 한다, 폐제헌왕후 윤씨」 중에서
인목대비 김씨는 조정 대신들에 의해 정략적으로 필요할 때만 존재 가치가 있었다. 그녀의 폐위와 복위는 권력을 가졌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결과였다. 상대방은 끊임없이 그녀의 위치를 흔들고 죽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인조는 대비 김씨를 모신다는 명분으로 즉위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그래서 인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인목대비 김씨는 역모의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권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인목대비 김씨는 사망한 후에도 역모와 관련된 구설수에 올랐다. 대비 상중에 궁궐에서 저주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정명공주가 의심을 받았지만 다행히 이 사건은 인목대비를 모셨던 궁녀들 선에서 처리되었으며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이처럼 인목대비 김씨가 사후에도 역모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위치가 언제든 역모의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자리이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던 그녀의 한계 때문이었다. --- 제3장 「삶을 살해당한 왕비, 인목왕후 김씨」 중에서
겉으로 보기에 왕비의 삶은 매우 화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조정 대신들의 정쟁에 휘말리면 그야말로 파리 목숨인 것이 왕비의 자리이다. 유씨는 이 같은 현실을 선조 대에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이다. 남편 광해군과 함께 언제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르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다행히 광해군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사대부들과 백성들은 광해군과 유씨를 부왕을 죽이고 형제를 살해한 폐륜 부부로 낙인찍고 있었다. 끝없이 계속되는 고변은 아마 유씨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광해군과 다른 뜻을 품었다 할지라도 그녀에게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누구나 남편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것처럼 그녀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남편의 죽음은 곧 그녀의 죽음이었다. 결국 유씨는 단지 신령한 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폐비 유씨와 광해군의 죄목 중 하나는 무당과 술사를 가까이한 것이었다. 사대부들은 유교적인 잣대로 두 사람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조정 대신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 무당과 술사들은 광해군의 권력을 배경으로 조정 대신들을 능멸하였다. 조선 사대부들이 누려야 할 기득권을 다른 사람들이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제4장 「무속을 믿어야 했던 왕비의 비극, 광해군부인 유씨」 중에서
강씨 가족 중 석견만 살아남고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황해감사 김홍욱이 강씨의 신원과 소현세자의 막내아들 석견의 석방을 직언하였다. 이에 효종은 김홍욱을 매로 때려죽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만일 강씨의 옥사가 모두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신원된다면 효종은 재위의 명분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 석견에게 종통의 소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강씨는 80년이 지난 1718년(숙종 44)에서야 겨우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신원될 수 있었다.
강씨 일가족의 죽음은 인조의 열등감, 후궁 조씨의 권력에 대한 야망, 김자점 세력의 집권 욕망 등이 얽혀서 나온 산물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했으므로 항상 신하들을 의심하였다. 인조는 연산군과 영창대군 등이 어떻게 왕위에서 쫓겨나고 사사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왕위를 위협했던 것은 신하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는 왕은 가차 없이 독살을 하거나 정변을 일으켜 갈아치웠다. 이러한 역사를 너무나 잘 아는 인조의 눈에는 아들, 며느리, 손자들조차 모두 정적으로 보였다. 신하들이 이들을 등에 업고 자신이 어렵게 얻은 왕위를 넘볼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인조의 열등의식을 부채질한 것이 후궁 조씨와 김자점 세력의 권력에 대한 야망이었다. --- 제5장 「시아버지에 의해 제거된 새로운 세계관, 소현세자빈 강씨」 중에서
사대부들은 장씨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대놓고 무시했다. 수재가 났을 때도 장씨의 책임이라고 했으니 하늘이 그녀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사대부들은 백성들에게 신분제는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 세뇌시켰다. 그들은 민씨가 하늘이 점지한 고귀한 사람이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말라 죽은 고목나무에서 꽃이 핀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다. 천민 출신은 왕비가 되어서도 안 되고 벼슬자리에도 앉으면 안 되었다.
장씨는 촘촘하게 얽혀져 있는 유교적 시스템에 구멍을 내기 위해 신령한 힘을 찾았다. 그래서 가장 효험이 있다고 생각한 무속에 의존했던 것이다. 사회 제도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대부들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 결국 그녀는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사회 제도에 반항한 그녀에게 사대부들이 저주를 내린 것이다. --- 제6장 「사대부들, 역사의 새 물결에 저주를 내리다, 희빈 장씨」 중에서
민씨는 자식에게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훈계한 엄격한 어머니였다. 고종은 아들 순종을 너무 어여삐 여겨 밥을 먹을 때도 반찬을 골라 주고 옷을 입을 때도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민씨는 순종이 잘못을 저지르면 때리고 꾸짖어 잘못을 깨닫도록 하였다.
이처럼 민씨는 백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나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제대로 헤아릴 줄 몰랐으며 오히려 자신의 생존권을 외국에 의탁했다. 그 결과 민씨는 백성들에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일본의 칼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민씨는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세력은 백성들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제7장 「진정한 국모가 되지 못했던 황후, 명성황후 민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