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돈 600원 들고 슈퍼 갔을 때의 기분을 아시는가. 가격표가 붙어있어도 혹시 10원이라도 더 나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600원에 맞게 마음을 세팅해 왔는데 그 물건이 없을 때의 당혹감! 그런데 이건 대놓고 700원이라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주인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안심탕면 올랐나요?"
"이번에 라면 값이 100원 정도 올랐어요."
헉, 그 사이에 100원이나 뛰다니,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져 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꼬냥이의 뱃가죽 너머에서 들려오는 위장의 소리. '먹어야 산다!'
"그… 그럼 안심탕면보다 싼 라면은 없나요?"
곧 죽어도 '폼생폼사' 꼬냥이 인생에 이런 대사를 칠 날이 올 줄이야.
"아, 있긴 한데 아까 다 나갔어요, 내일이나 돼야 물건 들어올 텐데."
덜컥! 이미 슈퍼는 전장, 사재기 전투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은둔형 꼬냥이 같으니라고! 라면 값 오른단 소리 들었을 때 전투태세 갖추고 달려들었어야 했는데 지가 무슨 갑부라고 '100원 올라봤자~'라고 코웃음을 쳤으니 이런 패배는 정해진 순서인 건가.
복잡한 심경으로 찌질 대며 대충 남은 라면들을 살펴보니 라면 중에서도 고급 브랜드 몇몇뿐이었다. 제길, 애초에 600원으로 살 수 있는 라면 따윈 있지도 않았어! ---「봉지 라면 천 원 시대의 허기진 자취생들」 중에서
드디어 첫 통화. 무섭더군. 쫌.
수화기 저편에선 40대 중반 정도 되는 아저씨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개인 사업가이며 출장을 왔다가 밤도 늦고 해서 전화방에 잠시 들러본 것이라고.
"출장오셔서 밤이 늦었으면 숙소에 들어가 주무셔야죠."
"음? 쿨럭… 음… 뭐 그 전에 피곤을 좀 풀려고 와봤어요."
왜? 아니 왜 피곤을 풀러 전화방에 가? 피곤하면 사우나 가는 거 아닌가?
"지금 뭐 입고 있나?"
오호라~ 이 아저씨 점잖은 척 하시더니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신다.
"'추리닝' 입고 있는데요?"
"……."
아저씨도 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침묵을 깨며 아저씨가 다시 물었다.
"잘 땐 뭐 입나?"
아니, 이 아저씬 남 입는 옷에 뭐 이리 관심이 많아?"
"'추리닝'이요……."
"하아……."
아저씨의 긴~ 한숨이 들려왔다. 아저씨는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좀 더 과감하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늘 밤에 만날까?"
"자야 돼요."
"같이 잘까?"
언니에 대한 의리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백두산 천지 너머로 내동댕이쳐 버리고 시간을 보니 대충 10분도 넘었고 해서 난 어떻게든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남편이 옆에서 끊으랍니다!" --- 「의리가 죄, ‘하악하악’ 전화방 알바 뛰다」 중에서
감긴 눈을 억지로 떴다. 사방엔 조용한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고 들리는 건 복댕, 삼식의 코고는 소리뿐. 그런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대체 뭐지……?
그 순간 침대 옆에 걸터앉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누구냐, 넌……."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옆으로 앉은 채 상념에 가득 찬 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얼굴이 없었다. 아니, 분명 얼굴은 있었지만 목부터 머리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풉! 마치 귀를 파는 커다란 면봉과 같은 모습이었다. 난 왜 이런 와중에도 진지해지지 못하는 걸까. 흑…….
"귀신이냐……?"
질문을 하니 면봉이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했다. 얼굴을 붕대로 싸고 있는 애한테 질문을 하다니…….
"잡아다 귀를 파기 전에 어서 물러가랏!"
면봉이는 벌떡 일어섰다. 화가 난 듯 부엌 쪽으로 가더니 냉장고 위에 있던 피자 상자를 휙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자슥, 성깔있네……. 꿈인지 생시인지 몸이 풀리고 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실제로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쳐있는 피자 상자를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쉑! 한 조각 남았는데……." --- 「밤마다 목매다는 옥탑의 총각 귀신」 중에서
처음엔 무늬가 요란한 티셔츠라도 입은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둘째 홀아비의 몸은 말 그대로 동물농장, 그것도 조잡한 농장이 아니라 '지대' 쥬라기 공원이었다.
"옆집 아가씨, 왜요? 아, 이 시간이면 우리 다 자야 되는데……."
"어버… 버… 쓰레기가……."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다리에 힘이 쫙 빠지는 것이 실로 오랜만에 전문가를 마주쳤을 때 느끼는 살 떨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에헤이, 더 자도 되는데 뭐 하나도 아니고 둘씩 나오나. 막내 홀아비가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아따매! 저 놈은 김홍도 영감의 송하맹호도일세. 골고루 하는구나.
이미 일은 커져버렸고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 되는데 이대로 도망치면 다시는 이 집에 못 들어올 것 같고 그렇다고 그동안 컨셉대로 하자니 아직 세상에 하고픈 일이 많은데……. 어떡하지? 아, 참말로 으째야 쓰까이……. --- 「조폭도 남자, 여인의 눈물에 무릎 꿇다」 중에서
"돈이 급해도 사채는 쓰지 마, 목구멍에 거미줄 막으려고 사채 끌어 썼다가 목구멍에 칼 들어가는 게 사채야. 물론 살다 보면 남에게 손 벌릴 때도 있겠지만 당장 눈앞에 저승사자가 올 때까지는 빚을 지면 안 돼. 당장 먹을 게 없으면 수돗물을 마셔. 나이가 들어서 빚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아닌 사람에 비해 세상 살기가 한결 숨통이 트일 거야."
예전에 농담 삼아 '아, 신장이라도 하나 떼든가, 사채라도 써서 이 반지하 좀 벗어나야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둘째 조폭은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세상이 무서울 것도 없었던 시절, 이 대책 없는 이웃사촌이 정말 급하면 사고라도 칠 것 같았던 걸까.
"남자 믿지 마, 아직 어려서 그저 잘 생기고 스타일 나오면 좋겠지, 그런데 남자는 굉장히 잔인한 동물이야. 언제나 도망갈 곳은 마련해두고 사는 게 남자야. 핑계와 핑계를 거듭하고 3분 카레처럼 즉석에서 어떤 감정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남자라는 거지. 더군다나 혼자 살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첫째도 남자, 둘째도 남자라는 거. 절대 잊어선 안 돼." --- 「닭 잡는 조폭과의 부동산 점령기」 중에서
채팅창을 보고 있었다. 서버 상태가 좀 버벅일 때라 서버다운을 한번 해야 하나 생각하며 살피는데 또 욕이 올라왔다.
"씨발……, 영자 새끼 그러고도 월급 받아 처먹나보지?"
"그러게요, 아주 이렇게 랙이 심한 걸 보니 일부러 우리 사냥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요."
"지랄 영자 물러가라, 개 같은 뇬아~ㅋㅋ."
안 그래도 화병, 위장병으로 내시경 받고 쉬지도 못하고 또 회사 들어와서 앉아 있는 날이었는데 그것을 보니 다른 때와는 조금 더 다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채팅창에다 적었다. 원래 GM들의 캐릭터는 게임 내에서 일반 유저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글을 써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공지사항"으로만 글을 쓸 수가 있다(고 난 생각했다). 난 욱! 하는 마음으로 채팅창에 이렇게 썼다.
카르미엔 - DUDWKRK SL CLSRNSI?" (영자가 니 친구냐?) --- 「dudwkrk sl clsrnsi… 헉!」 중에서
"주인분이 조금 깐깐하세요."
"지금 저희 집도 워낙 강적이라 괜찮을 거예요."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연락을 받은 듯 근엄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집은 다 봤어?"
"예." (초면부터 왜 반말이신지…….)
"이 집만큼 좋은 집이 어디 있어, 그 값에. 나도 돈 욕심 없어서 어려운 사람 돕는 셈치고 싸게 내놓는 거야."
옥탑방 보증금에서 몇 배를 올려서 하는 이사라 이 정도 집은 솔직히 평균 시세였다.
"도배랑 장판은 해주실 건가요?"
"왜? 깨끗하게 썼는데 할 이유가 없잖아, 1층 아가씨, 집에 하자 생겼어?"
순간 당황하는 세입자. 아니 월세에 도배랑 장판 해주는 거야 당연한 건데 왜 불똥이 세입자한테 튀나.
"아니요, 집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새로 이사하는 건데 도배장판은 여쭤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난 못해줘, 그럴 돈도 없고. 꼭 할 거면 1층 아가씨가 돈 내놓고 가."
순간 왜 내가 울컥했을까. 아마 한마디 말도 못하고 울상 지은 세입자의 모습에서 배추도사 앞의 내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러시면 안 되죠, 월세방 살면서 어느 세입자가 도배랑 장판 비를 내놓나요? 안 해주시면 그만이지, 이상하시네."
꼭 해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벽지 장판 모두 깨끗하긴 했지만 사람이 살았던 집에서 어느 정도의 생활감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이유로 집주인에게 물어본 것뿐인데 세입자가 죄인이라도 되는 양 몰아대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우리가 워낙 깔끔하게 살아서 집 앞 골목도 더러운 꼴 못 보니까, 1층 사는 사람이 골목 청소해줘야 돼."
--- 「발품으로 집 구하기, 구직보다 어렵더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