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등에서 연구와 강의, 번역을 병행하고 있다. 클라이스트의 단편집 『버려진 아이 외』로 2006년 한?독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아르토 파실린나의 『모기나라에 간 코끼리』 등이 있다.
기다림. 며칠. 몇 주. 기다림. 몇 달. 몇 년. 절망의 바닥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기. 빙하의 덫은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트롬쇠항을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가 사방에서 테게트호프호로 다가온다. 어디에도 열린 바닷길은 없다. 테게트호프호는 이제 배가 아니라 하나의 오두막이다. 얼음 덩어리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피난처이자 감옥이다. ---p.82
이곳에서의 아름다움이란 그 어디에서보다도 허망한 것이다. 그리고 정적은 단지 휴식기, 한순간일 뿐이다. 점차 이 얼음의 영원함, 아름다운 얼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다. ---p.132
빙하에서의 생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그렇게 외롭고 버려진 듯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내게는 우리의 공허함을 기술할 능력이 없다. ---p.194
테게트호프호의 장교들은 이미 배에 있을 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결정을 내렸다. 철수하다가 희망이 없을 경우, 식량과 기운이 소진된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대원들에게도 자살을 권할 것이다. 왜냐하면 총에 의한 죽음은 점진적이고 비인간적인 몰락보다 자비롭고 무엇보다 북극 탐험의 몰락에 동반되는 두려움보다 낫기 때문이다. 고깃덩이 한 조각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고, 인간세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마침내 인육을 먹고 광기를 얻게 되는 북극에서의 몰락 말이다.
187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가 노르웨이의 트롬쇠항을 출발한다. 육지의 지휘관 파이어와 바다의 지휘관 바이프레히트를 주축으로 두 명의 장교, 의사, 빙하 전문가, 기관사, 사냥꾼 등 총 24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실은 테게트호프호는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만다. 약 2년간 지속된 전대미문의 탐험의 시작이었다.
한편 20세기의 북극은 더 이상 탐험대가 겪은 세계가 아니다.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북극은 여행객, 탄광에서 단기간에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 떠나는 광부들, 북극 연구자들이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마치니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탐험대가 갔던 루트를 되짚기 위해 극지 연구소의 탐사선에 오르고, 개썰매를 배우는 등 실제로 탐험대가 갔던 루트를 재연해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니는 홀연히 사라지고, 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