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의 문제
지난해 뉴허라이즌스호가 명왕성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바 있다. 명왕성 탐사는 1990년대 시작된 나사의 ‘기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 먼 우주까지 탐사선을 보내는 걸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에서 우리는 외톨이인가?’ 우주와 생명 탄생의 비밀과 관련해서 수천 년간 인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큰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구하기 위함이다. 137억 년 전 빅뱅 직후 생겨난 기본입자들이 행성, 항성, 태양계, 은하수 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의식을 가진 존재로 이어졌는지 탐구하거나, 혹은 35억 년 전 아미노산들이 우연히 결합해 생긴 박테리아로부터 현생인류가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유입된 외계 생명체가 우리의 모태인지 논하는 것도 결국은 우주의 ‘빅 히스토리’가 곧 우리의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체 물리학자들이 스토리텔러로 등장해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시나리오가 완성되어감에 따라 인문사회과학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사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회와 문화를 연구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스티븐 호킹 박사의 새 책이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만은 없다. 오히려 기원프로그램 같은 융합 연구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가져올 패러다임의 전환에 선제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에 필자는 일반 진화론 논쟁을 배경으로 언어학, 기호학, 동물 의사소통, 진화인류학, 발화생리학, 유전공학, 분자생물학 등의 연구결과들을 검토함으로써 ‘과학계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Morten & Kirby, 2003) 과제인 언어 진화의 문제에 도전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기원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왜 언어 진화인가
“본 학회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문을 더는 접수하지 않는다.” 1866년 프랑스 파리언어학회가 새롭게 정한 회칙이다. 언어의 기원을 다루는 논문을 일체 거부한다고 공표한 이유는 당시의 지식과 기술로는 대략 6000년 이전까지만 언어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었으며, 데이터 부족으로 언어의 기원에 대해 근거 없는 해석만 난무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소J. J. Rousseau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당시 언어 기원의 문제가 어떻게 신학적 세계관이나 자민족중심주의와 얽혀 있는지 보여준다. 가령 16세기 바카누스J. G. Bacanus라는 독일 사람은 신은 전능하므로 완전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언어는 독일어이며 따라서 독일어가 신의 언어였다고 주장했다. 17세기에는 스웨덴인 캠케A. Kemke가 똑같은 억지 주장을 펼쳤다. 단 이번에는 독일어가 아니라 그의 모국어가 신의 언어였다.
한편,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F. de Saussure는 『일반언어학강의』에서 언어의 통시태diachrony나 역사언어학보다는 언어의 공시태synchrony를 중시하는 구조-기능주의 언어학을 강조하는데, 이런 학문적 태도는 언어 기원의 문제 자체를 금기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일반언어학강의』는 그가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했던 강의노트를 토대로 제자들이 1916년 그의 이름으로 편집·출간된 책으로 내용의 진위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20세기 중후반 생성문법으로 언어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촘스키 역시 심층에서 표층구조로 전이되면서 문장이 변형·생성되는 규칙과 인류 공통의 보편문법을 지배하는 원리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언어학의 궁극적 목표로 삼음으로써 언어 진화의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했으며 주류 언어학계를 이끌던 그의 무관심은 반박할 수 없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990년대 초 핑커와 블룸(Pinker & Bloom, 1990)이 ?자연언어와 자연선택?이라는 제목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관련 문제에 대한 학계의 부정적 태도는 달라졌다. 그들의 연구가 진화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한 것은 것도, 그렇다고 새로운 사례를 제시한 것도 아니다. 언어 진화의 문제를 푸는 데 익히 알려진 다윈의 적응 개념을 적용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논문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 진화의 문제를 놓고 ‘빅뱅설’을 주장하는 촘스키와 굴드에 반대해 자연선택설을 옹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0년 넘게 흐르던 불편한 침묵을 깨고 화석인류가 어떻게 호모 로쿠엔스가 되었는가를 공론화하는 일이 흥미롭고 학술적으로도 가치 있는 지적 활동임을 입증한 것이다.
초기 언어 진화 단계에서 언어와 제스처는 어떤 관련이 있었나? 언어와 음악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진화적 부산물이라면 인과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동물들의 신호음체계와 인간의 음성소통 차이와 공통점은 무엇인가? 뇌와 언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전자가 후자에 영향을 주었는가 아니면 둘이 공진화했는가? 언제 그리고 어떤 계기로 우리의 화석 선조들은 소리phones를 음소phonemes라는 추상적 범주로 인식하는 능력을 개발했는가? 그리고 그 진화적 압력(들)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더 이상 고리타분하다거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취급되지 않는다.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1996년부터 지금까지 격년으로 관련 주제들에 대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21세기 들어 하버드대학교에는 진화언어학회가 출범되기도 했다. 언어 진화는 이제 언어학, 인지과학, 컴퓨터모델링, 진화인류학, 고고학, 유전학, 분자생물학 등이 함께하는 흥미로운 공동 작업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언어연구패러다임도 구조-생성주의에서 생태-진화론으로 이동하고 있다.
구조-생성주의에서 생태-진화론으로
재켄도프와 핑커(Jackendoff & Pinker, 2005)는 촘스키의 구문 중심 언어학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형식 문법을 언어 진화의 문제에 맞도록 재구성하자고 제안하며, 언어 진화에 디지털 모델링을 최초로 시도한 허포드J. Hurford는 오늘날 생성언어학자들마저도 보편문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언어 분석 시 통용되는 생성주의적 선 개념범주들preconceived categories을 진화론 패러다임에 맞게 조정하자는 제안에는 생성주의가 위기에 이른 패러다임(T. S. Kuhn)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비하고 언어의 본질을 제대로 알려면 진화의 문제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런데 진화는 생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가령 유타대 지질학 및 지구물리학 부교수인 세계적 석학 샘슨S. D. Sampson은 학문의 배타적 성격을 지양하고 생태와 진화를 아우르는 학제 간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한다(리처드 외, 2012: 281-2).
나는 사람들이 진화의 본질을 잘 모르는 것은 학계에 만연하는 분획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를 두 개의 근본적인 과학 개념인 생태와 진화 사이의 허공에 처하게 하였다. (...) 생태학자들은 생태계에 미치는 지역적, 시간적 효과들을 보기 시작했고, 진화론자들은 진화 패턴과 진화 과정에서 생태 역학이 담당하는 역할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언어 멸종
언어를 자신의 생존을 위해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생명체로 간주할 수 있다면, 오늘날 언어 생태계는 어떤가? 바이러스는 치사율과 전파력으로 그 생존력을 가늠할 수 있다. 최근 발생한 에볼라가 슈퍼바이러스로 분류되는 이유는 기존의 항체 치료에 내성이 생겨 치사율과 전파력이 높은 돌연변이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언어의 생존력은 현재 해당 언어를 사용하거나 제2 외국어로 학습하는 사람(화자)과 모국어로 습득하는 아이의 수로 결정된다.
오늘날 전 세계 언어의 수는 대략 6,500개로 추정되는데, 세계 인구의 절반은 열 개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로버트와 빌, 2006:64). 현재 생존과 번식력이 가장 좋은 ‘슈퍼언어’는 물론 영어다. 모국어 화자는 4억 명, 제2 공용어로 영어를 배우는 사람은 4억 3,000명 정도이며, 영어를 제2외국어로 학습하는 사람의 수도 가장 많다. 이에 비해, 전 세계 언어의 절반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전수되지 않는다. 187개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 중 149개가 이미 사라졌거나 사멸 단계에 접어들었다(아즈마, 2001:73-4). 2주마다 하나씩 언어가 사라지고 있으며, 전 세계 언어 중 90% 정도가 사멸 위기에 처해 있다는 보고도 있다(크리스틴, 2009:424).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금세기가 지나기 전에 경쟁력을 갖춘 극소수의 언어 이외에 대부분은 지구 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언어의 위기는 소수언어집단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들의 언어 (그리고 언어와 함께 그들의 독특한 정신구조)가 사라지고 경제적으로 우세한 극소수의 슈퍼언어만 남아있는 세상이 얼마나 단조롭고 삭막할지 한 번 생각해보라. 인류 진화와 문명의 흔적이 기록된 언어 다양성을 보존하고 생존의 위협에 처한 소수 언어와 문화들을 보호하는 일은 분명 종으로서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