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입니까?”
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하고 히틀러의 나치당이 득세하면서, 독일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로 했지만 그 여행은 출발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미국의 우익단체인 여성애국단이 유태인이며 무정부주의자인 아인슈타인을 비방하는 문서를 미 국무부에 보내 그의 입국 금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비방 문서에 따라 베를린의 미 영사관에서는 아인슈타인의 비자 승인 여부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귀하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그와 미국 우익 세력과의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군국주의를 피해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혁명주의자들의 도시 취리히에서 국제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이미 반전 성명을 발표하는 등 평화주의자로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제2제국의 몰락과 볼셰비키 혁명을 목도하면서 “사회-경제적인 요소가 정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깨닫고 적극적인 행동주의자가 되었다. 미국을 방문하던 1933년, 나치당의 정권 획득 소식을 듣고, 아인슈타인 일가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나치 독일을 탈출하는 수많은 망명자들이 미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해 히틀러와 파시스트들을 저지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순진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전쟁에 헌신하는 투사였으며, 미국이야말로 세계 평화와 자유를 수호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원폭 개발의 비밀
미국 정부는 아인슈타인의 요청에 따라 맨해튼 계획을 추진했다. 맨해튼 계획에는 나치에 맞선다는 대의명분 아래 여러 유태인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으로 히틀러를 위협해 전쟁을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실제로 독일이 원폭개발을 중단한 뒤에도 그들은 계속 원폭개발을 추진했다. 원폭은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일본에 투하됐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원폭개발에 참여했다면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는 원폭개발에 대한 여론을 바꾸고, 개발자들을 중단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 당국은 그를 맨해튼 계획에서 제외했다.
냉전 시대와 반핵운동, 그리고 후버-매커시즘
원폭개발을 촉구했던 아인슈타인이나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끔찍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원자력과학자 비상위원회를 결성하여 미국인들에게 핵무기의 위험을 경고하고, 평화를 위한 원자력 기술 이용을 홍보하는 반핵운동을 펼쳤다. 아인슈타인과 미국의 진보진영은 소련의 핵개발은 제지하면서도, 핵보유를 포기하지 않는 미국의 정책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정치가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런 발언을 “정치적으로 순진한” 인물의 허튼소리쯤으로 여겼지만, FBI는 달랐다. FBI의 국장 후버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원폭기밀을 소련에 넘길 수 있는 위험인물이라고 판단, 끈질기게 아인슈타인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에게 전화를 건 친러시아 인사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아인슈타인에게 보내진 생일 축하 전보를 가로채고,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면서 아인슈타인과 주변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반체제 인사”들과의 연대
아인슈타인은 반핵운동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여러 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 연합군을 후원했고, 1946년 미국에 인종차별 폭력이 만연했을 때에도 폭력 근절법을 제정하라고 트루먼에게 편지를 보냈다. 또한 여러 반전 단체의 핵심인사로 활약했다. 당시 폴 로브슨, W. E. B. 두 보이스처럼 유명한 진보 인사들과의 연대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FBI는 그의 이런 활동을 모두 체제전복적인 공산당 전위 조직 활동에 가담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그가 가입한 단체 목록을 작성해 아인슈타인 파일에 포함시켰다.
나치와 FBI가 손을 잡다 ― 아인슈타인 간첩 사건
1950년 2월, 아인슈타인은 전 영부인이자 진보 인사인 엘러너 루스벨트가 진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 수소폭탄의 개발은 인류 전체의 파멸을 초래할 뿐이라면서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비난했다. 후버에게 아인슈타인의 이런 발언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체제전복적인 발언이었다. 그때부터 1955년 아인슈타인이 죽을 때까지 후버는 아인슈타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추방하려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FBI는 아인슈타인의 아들이 소련에 인질로 잡혀 있어서 그가 소련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거나, 아인슈타인은 공산주의자로서 과거 독일에서 소련 간첩 조직의 중간 연결책 노릇을 했다는 허위 정보를 이용했다. 그들은 그것을 입증할 증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몇 년간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FBI도 아인슈타인의 명예를 훼손시킬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때까지는 공개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사전에 이 작전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간다면 FBI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까지 아인슈타인을 지지하는 수많은 대중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파일은 FBI내에서 최고위층에게도 비밀로 지켜질 만큼 철저한 보안 속에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결국 FBI의 “아인슈타인 간첩 사건”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이 얻었던 아인슈타인 간첩 관련 사건에 관한 정보는 나치의 패망 이후 미국 정보기관으로 자리를 옮긴 나치 전력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CIA는 이런 나치 정보기관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미 1930년대에 나치는 유태인 아인슈타인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간첩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고, 그 정보가 전후 미국으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매카시즘의 퇴조 ― “증언을 거부하라”
1950년대 냉전이 심화되면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미국에 몰아치자 FBI와 비미활동 위원회(주로 ‘빨갱이 토벌’을 목적으로 하던 미 하원 조사위원회)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미국의 우익 보수 세력은 이들 기관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많은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노조운동이나 인권운동을 돕던 비판적 지식인들마저 직장을 빼앗고, 투옥시켰다. 공포에 휩싸인 미국인들은 동지를 고발하거나 침묵을 지키며 사태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달랐다. 종교재판을 연상시키는 매카시즘 선풍이 아인슈타인에게는 나치가 벌였던 인권탄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 FBI 국장 후버를 비롯해 많은 우익 인사들은 독일 나치정권과 깊은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 빨갱이 재판의 “심문관들”에 맞서서 아인슈타인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공산당의 위협”과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던 미국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청문회에 소환된 증인들에게 증언을 거부하라”는 발언을 신문 지면에 발표하는 등 그의 공공연한 저항 운동은 50년대 미국 시민운동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