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는 책을 들고 냄새를 맡았다. 먹 냄새, 닥나무 냄새, 노란 책표지에서 나는 치자 냄새. 선비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이런 것이었는지. 아직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많은 책을 본 적이 없었다. 책 냄새가 좋아서 가슴에 안았다. 벽에 글씨가 담긴 족자가 걸려 있고, 창 쪽으로 책이 가지런히 꽂힌 낮은 책장과 책상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정갈한 방이었다. 양반을 욕심덩어리로 본 것이 잘못된 생각일까. 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런 방에 욕심이 자랄 건더기가 어디 있는가. 혹시 이 방만 그럴듯하게 꾸며 놓고 안채에는 가난한 백성에게서 착취한 금은보화가 잔뜩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 p. 52~53
“미끄러져서 발목이 부러질 뻔했습니다.” “부러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 아니냐.” “여름 내내 누에 먹여 살린다고 힘들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있는 게야. 뽕잎을 더 딸 곳이 없으니 잠시 쉬라고.” “미워서 뒷간에 처넣고 싶었는데 이젠 고것들이 그립습니다.” “집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서 밭뽕과 산뽕을 섞어 먹이면 멀리 가지 않고도 누에를 충분히 먹일 수 있단다.” --- p.167
“어째서 비겁하다고 하십니까. 갈대가 바람에 몸을 눕히는 건 비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함이 아닙니까.”(…) “수리야, 쌀이나 보리 한 톨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더냐. 한 톨의 보리가 땅에 떨어져 썩는 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란다. 오늘 내가 죽는 이유는 먼 훗날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내가 죽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히는지 알게 될 테니.” --- p.266~267
선암이 수리의 영혼을 키워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면, 쌀독에 거미줄을 칠 것 같은 살림살이는 그를 훌륭한 들개로 만들어 주었다. 갈옷을 입은 수리의 모습은 한 조각 노을 같고 그늘 같아서 흡사 산의 일부분 같기도 했다. --- p.289
수리는 곱게 싸서 가져온 비단을 내놓았다. 황사영이 비단을 받아서 조심스레 펼쳤다. 천잠사로 짠 비단이 등잔 불빛에 서늘하게 빛났다. 비단을 살피던 황사영이 곱다며 탄식을 거듭했다. … 야생 산누에의 실 천잠사로 짠 비단이라니까 황사영이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의 잠을 자고 네 번의 허물을 벗은 뒤 고치를 짓고 뱉어 낸 실. 천잠사는 천하의 명검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실이었다. --- p.292~293
지금까지 수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배가 고픈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선암이 순교를 하고 나서야 배고픈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외로움인 것을 알았다. 높은 산에 혼자 사는 독수리가 된 기분이었다. 독수리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가없는 하늘을 맴돈다. 하늘을 맴돌다 지치면 다시 산등성이 높은 바위에 내려앉아 고독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누구보다 강하고 날카로운 부리를 가졌지만 독수리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동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