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는 무엇보다도 인류가 자연과학적 지식을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 기본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전 지구적 환경문제, 과학기술의 군사화, 에너지 문제, 정보통신 혁명과 그 사회적 영향의 확대, 유전자 조작 및 생명윤리 문제 등 우리 주변에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여러 사회적 문제가 부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 p.13
과학의 눈을 뜨지 못하면 폭설이 내리고 황사가 몰아치는 모든 자연 현상이 두렵게 느껴지게 된다. 그런 사회에서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온갖 신비주의와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절대 권력이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과학의 눈으로 보면 조류 독감과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도 사실은 신의 저주라기보다 철새를 비롯한 다른 생물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 현상이다. 그런 위험을 극복하는 길은 과학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 p.15
영국의 과학철학자 스노가 지적했듯이 과학문화를 정착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교육이다. 성인을 위한 평생 교육이 필요하고 학교에서의 효율적인 과학 교육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에게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과학문화를 우리의 윤리적, 역사적 전통 속에 화학적으로 접목시키기 위한 실천적인 목표를 찾아야 한다. --- p.21
과학문화 확산 노력의 핵심을 과학정신에 두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과학정신으로 우리 사회를 더욱 맑고 투명하게 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과학지식의 중요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과학지식이 전제되지 않은 과학정신은 무의미하다. 세상은 알아야 보이는 법이다. --- p.23
“문과계 사람들이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르는 것은 이과계 사람들이 셰익스피어가 누군지 모르는 것과 같다.” --- p.25
과학의 물화(物化), 도구화 현상은 사실상 20세기를 지나면서 확대 재생산됐고, 급기야 오늘날 인간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문화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양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인 C. P. 스노가 지적한 것처럼, 상호간에 대화조차 불가능한 이질적인 ‘두 문화’가 형성된 셈이다. --- p.26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현대 과학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더 발전된 세계관은 철학자들만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사상이 정립돼야만 가능하다. 과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인문학자도 철학을 모르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절름발이다. 기초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을 허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p.33
“인간에 관한 과학이 자연과학을 포괄하게 될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도 앞으로 인간에 관한 과학을 포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과학은 한 부류의 과학으로 될 것이다.” --- p.35
거대한 기술공학 체계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과연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미래의 가능한 인류나 후손들에 대한 책임과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의 도구적인 이성이 깨면서부터 발언권을 상실해 버린 자연의 권리는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유전공학의 발전에 의한 생명의 합성, 시험관 아기, 대리모, 장기이식의 실용적인 고려에 의해서 주장되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요구 등 일련의 과학기술과 인간의 삶이 만나는 경계선상에서 제기되는 문제들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철학적인 성격을 갖는 물음들이다. --- p.46
과학기술은 성공하는 순간 존재의 일부가 돼버린다. 그런데 막연히 인간의 존엄성만으로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의 목적이자 이념적 구호이지 수단이 아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따로 필요하다. --- p.52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 p.60
과학은 과학의 자리에서 자신이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그 영역을 확장해가고 종교는 종교의 자리에서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한다. 서로 부딪치는 곳이 있다면 그리고 그 다툼이 과학의 믿음체계와 종교의 믿음체계의 투쟁이 아니라면 그 다툼을 이해할 때 더 큰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p.70
과학은 도구적 합리성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건강한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종교도 교리에 따라 자신의 가치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과 대화하고 관용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과학이나 종교나 자신의 견지에서 사회를 지도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사회의 여러 목소리들을 경청하고 자신의 기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민주적 태도를 체화해야 한다. --- p.75
사람들은 묻는다. 이 첨단과학의 시대에 웬 신화인가 하고. 신화는 모듬살이가 꾸는 꿈이다. 어느 나라의 신화가 되었든, 그 나라의 신화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원망(願望)이 고스란히 투사돼 있다. 과학은 그 꿈을 실현시키는 힘이다. 사람들의 꿈을 읽지 않은 과학이 무슨 소용인가? 마르크스는 ‘신화는 상상력을 절묘하게 부려, 자연을 형상화하거나 자연의 정복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자 마르크스에게까지도 과학사는 과학의 ‘신화 따라잡기’ 역사다. --- p.80
‘과학은 이성의 산물이고 예술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렇지 않다. 과학과 예술 모두 이성과 상상력이 결합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학과 예술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 p.85
모든 학문이 엇물린 과학기술학(STS)의 탄생은 날로 중요해지는 과학기술을 인문 사회과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세기 말 싹튼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20세기 전반에 이미 독립 학문으로 정착했다. 1930년대로 올라가는 과학사회학은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뒤를 이어 과학기술정책학, 과학기술경제학, 과학인류학, 기술경영학, 과학과 문학, 과학과 법 등의 분야들이 전문화되어 갔다. 이런 분야들을 묶어 과학기술학으로 이른지도 한 세대가 넘었다. --- p.99
‘두 문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심각한 원인은 ‘문과-이과’로 구분된 교육체계에 있다. 고등학교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구분은 대학으로 이어져 우리 학문사회에 견고하고 끈질긴 장벽을 형성하게 만든다. --- p.102
“기초과학 연구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옥시모론(모순어법)이다. 기초과학의 연구 결과 중에 엄청난 기술혁명을 가져온 경우가 많이 있지만, 애초부터 그런 기술개발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 기초과학 연구는 아니다. 그런데도 기초과학 연구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제안서에는 연구의 파급효과, 즉 쓸모가 있느냐 하는 것을 쓰도록 되어 있다. --- p.113
비록 지금이 빠른 성과를 요구하고 돈이 중심인 세태라고 하더라도, 과학 분야만은 예외가 되어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처음 가졌던 그 순수한 마음과 한결같은 자세로 과학을 바라보고 연구해야 한다.
--- p.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