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의 삶은 유한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유전자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 p.16
1952년 개구리 체세포 핵치환 성공.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 1983년 수정란 핵치환으로 새끼쥐 출산. 1986년 수정란 할구로 면양 출산. 1997년 체세포 복제로 복제양 돌리 탄생. 1999년 12월 인간 22번째 염색체 유전자 지도 완성. 숨 가쁘게 치달아온 생명공학이 생명 연장과 식량, 연료난 해소 등으로 `멋진 신세계’로 인도할 것인가 아니면 복제인간 등장과 새로운 종에 의한 생태계 파괴 등 또 다른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인가? --- p.23
20세기가 과학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생명공학의 세기다. 유전자와 생명공학이 21세기 인류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유전자 치료, 인간 배아 복제, 인간 복제, 동물 복제, 맞춤 아기, 유전자 변형 식품, 재생 의학 등 생명공학 혁명이 예고한 기술은 20세기 인간들이 상상했던 것을 뛰어넘는다. --- p.25
유전자 조작이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인 시간성을 파괴하는 것으로써 이는 생명 자체의 파괴를 의미한다. 한 개체의 생명이 있기까지 수천만 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데 한 순간의 조작으로 시간의 의미성을 파괴하는 것은 인류에게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 p.35
과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문학적 상상력이 자유로웠던 올더스 헉슬리가 복제된 인간 사회를 공상한 「멋진 신세계」의 시대는 ‘포드 기원 632년’인데 이 작품이 발표된 것이 1932년이므로 그가 설마하며 그린 ‘신인류 세계’는 그로부터 1세기도 안된 사이에 다가온 것이다. --- p.49
복제인간의 모성애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부부의 사랑이란 게 존재할까. 기존의 인간관계가 파괴되어도 좋은 것인가. 복제인간이 동시에 태어나건 시차를 두고 태어나건 사회·윤리적인 문제는 마찬가지로 남는 것이 아닌가. 괴생명체의 출현,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위험성을 누가 예측할 것인가,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인간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괴물은 인간인가, 짐승인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 p.53
배아의 지위를 둘러싼 대립이야말로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자 했던 근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근대주의는 세계 안의 모든 복잡한 존재들을 이렇게 큰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놓고, 그 한편(즉 주체, 인간, 사회)에만 존엄성을, 나머지 한편(객체, 비인간, 자연)에는 아무 존엄성도 부여하지 않는 비대칭적인 윤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 면에서 배아 줄기세포 논쟁의 두 당사자인 과학계와 종교계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대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근대주의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 p.69
배아가 인격체라면 생명권을 갖는다. 인격체가 아니라면 한 발 물러나 그것이 인격체에 이르는 통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과거에 배아로 존재하지 않고서 지금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배아는 단지 잠재적 인간일 뿐이므로 실제 인간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인정한다 해도, 다른 존재와 달리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배아도 그에 준하는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한다. 임의적 실험이나 수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 p.75
생명과학의 발전이 가져오는 가장 부정적인 측면이 사람을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유전정보에 의해 결정되는 물질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과학만능주의의 피해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모든 것이 유전정보에 의해 결정된다는 물질주의적 사고에 기인한다. --- p.79
생명의 본체인 유전자를 다루는 생명과학자들에는 신이 내려주신 ‘판도라의 상자’를 소중히 간수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 p.83
삼척동자도 아는 과학기술의 철칙은 윤리와 안전이다. 가속이 빼어난 자동차는 감속 장치가 훌륭하므로 빛난다. 생명공학도 마찬가지다. 연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정과 결과가 미칠 사회적·경제적·환경적 파장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명공학은 살아있는 생명과 유전자를 직접 다루기 때문이다. --- p.85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식량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의 허구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지금 식량은 지구 인구가 필요한 양의 1.5배가 생산되고 있는데도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분배 문제라고들 말한다. 분배가 아니라 절대량이 문제라도 유전자 조작은 식량의 해결책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식량 부족을 해결하려면 같은 면적에서 훨씬 더 많은 생산을 해야 한다. 그러나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증산과는 무관하다. 가장 많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심은 미국에서조차 그 덕에 엄청나게 생산량이 늘었다는 보고는 어디에도 없다. --- p.96
인간 게놈은 인류가 출현한 이후 사람들의 세포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설계도이다. 이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이 만들어지게 된 설계도를 갖게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발전임에 틀림없지만 과연 이 설계도의 해독을 통해 인류에게 유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마치 보물섬 지도를 발견한 사람들이 탐욕 때문에 보물이 줄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유전자 정보를 잘못 이용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 p.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