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알리사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웃음이 섞인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의 노크 소리가 묻힌 것일까. 문을 두드리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나는 방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방 안이 어두워서 알리사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이 내려오고 있는 십자형 유리창을 등진 채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뒤를 돌아다보며 중얼거렸다.
“오, 제롬! 또 왔어?”
나는 알리사에게 입을 맞추려고 몸을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내 인생을 결정짓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불안해지곤 한다. 무엇이 알리사를 그토록 슬프게 만든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지금 오열을 터뜨리고 있는 이 가녀린 영혼이 감당하기에는 그 슬픔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있는 알리사 옆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솟구쳤던 낯선 격정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알리사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뒤, 내 마음이 흘러넘치는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사랑과 연민, 감격, 헌신, 미덕이 한데 뒤섞인 묘한 감정에 취한 채 온 힘을 다해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소녀를 공포와 악과 고된 삶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며……. 나는 기도를 하면서 감정이 복받친 나머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 p.27~28
나에게 기대고 있던 알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블라우스에서 얇은 종이로 싼 작은 상자를 꺼내어 나에게 내밀다 말고 머뭇거렸다. 뭔가 망설이는 듯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제롬. 자수정 십자가 목걸이야. 사흘 동안 품에 지니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너한테 돌려주고 싶었거든.”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왜 그걸 나한테 돌려주려는 거야?”
“나에 대한 추억으로 간직해 뒀다가 네 딸에게 줘.”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내 딸이라니?”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봐. 제발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날 바라보지 마, 응? 그럴수록 내가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지잖아. 있잖아, 제롬. 언젠가 너도 결혼을 하겠지? 아니, 대답은 하지 마. 내 말을 끊지 말아 줘, 제발. 나는 그저 내가 널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네가 기억해 주길 바랄 뿐이야.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삼 년 전부터, 난 네가 좋아하는 이 십자가 목걸이를 언젠간 네 딸이 날 추억하면서 목에 걸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물론 내가 누군지 모른 채로 말이야. 어쩌면 네가 그 애에게…… 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겠지.”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적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직접 주면 되잖아! ……알리사! 내가 대체 누구와 결혼을 하겠니? 나는 너밖에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
나는 그녀를 덥석 끌어안고 미친 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내게 몸을 맡겨 상반신이 거의 뒤로 젖혀지다시피 한 그녀를 한동안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흐릿해지더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잠시 후 그녀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젠 늦었어, 제롬. 우리가 사랑을 통해, 사랑보다 더 큰 것을 보게 된 그날부터 이미 어긋나 버린 거야. 제롬, 네 덕분에 내 꿈이 아무리 높아졌다 해도, 인간적인 만족 앞에서는 추락해 버리게 마련이야. 난 자주 우리가 함께하는 삶이 어떨까 상상해 보곤 했어. 우리의 사랑이 완전함을 잃는 그 순간부터…… 나는 우리의 사랑을 견뎌 낼 자신이 없어졌어.”
“서로를 잃어버린 우리의 삶에 대해선 생각해 보진 않았니?”
“안 해 봤어! 단 한 번도.”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한동안 나란히 걷기만 했다.
--- p.185~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