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점의 잔잔한 어둠, 그 어둠 속에 느슨히 스며 있는 깊은 정적,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사람을 성실하게 복원하지 못하는 흐릿한 거울의 불명료함, 민이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란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 따위 갖지 않는, 그저 그 순간만을 살다가 죽는 것이 가능하다면 응급실의 노인을 떠올리며 미리 슬픔에 잠식될 필요도 없을 터였다.
--- p.9
세계의 농도가 묽어지는 게 느껴졌다. 묽어지면서 흐릿해지는 세계, 낯설지는 않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생애가 지나가는 곳, 죽는 건 또 다른 생애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므로 불안할 것도 아플 것도 없는 세계, 생애와 생애는 기차 칸처럼 연결되어 있으니 손에 쥐고 있는 표를 잃어버린대도 상관없는 곳, 그런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 p.116
몽롱했던 어둠, 흐릿한 거울, 톱밥 냄새와 차렵이불의 감촉은 콘크리트 먼지에 묻힐 것이고 성스러움에 가까웠던 목수의 노동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 허공으로 돌아갈 것이다. 소진만 가능했던 이 세계의 여분 같은 공간, 그 공간이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게 의심될 때도 찾아갈 곳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 p.179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일 터였다. 이제 여름은 설산이나 사막보다 더 먼 곳처럼 느껴졌다. 언제였던가. 밀폐된 방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죽어가는 꿈을 꾸었던 가구점에서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가엾다고, 그때 수는 생각했었다. 타인의 애도나 눈물 없이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어버린 노인이 아니라 그 노인의 세계가 담긴 오르골을 품에 안고 있던 여자아이가 가엾었다. 그렇게 죽음을 안고 다닌다면 살아 있는 매 순간이 불안과 고독으로 요동칠 터였다.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아이, 수는 생각했다.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