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지혜야, 앨범을 만들자. 응?”
무엇보다 엄마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던 것은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하기 위해 내가 쏟아부은 노력이었다. 눈물겹도록 처절했고 추해 보일 만큼 지독했던 그 노력은, 내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 것이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나는 언제 급사할지 몰랐고 내게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나를 위로했던 찬송가로 이루어진 그 음반은 《홀리 로드Holy Lord》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상 내 유작 앨범이었다. 스물두 살의 유작 앨범 / p.25
결코 완성될 것 같지 않았던 〈치고이너바이젠〉은 소외 계층인 관객들 앞에서 내 삶에 관한 이야기와 연주를 함께했던 바로 그날 완성되었다. 그런 경험은 〈치고이너바이젠〉만이 아니었다. 너무 어려워서 손도 대지 못했던 곡들,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만 맴도는 것 같았던 곡들이 이야기와 연주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무대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10대 시절 내내 하루에 많게는 열대여섯 시간씩 연습하면서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들이 한 번에 풀려나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는 듯이 연주하고 연주하듯 사는 것임을. 그렇게 삶과 예술이 연결될 때 진짜 음악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삶을 예술에 희생시켰던 그 시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 엄마와 교수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지만 듣지 않았던 것, 연습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큰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푸른색 옷을 입은 청중 : 사라사테, 〈치고이너바이젠〉/ pp.58~59
아빠는 없었지만 내게 그 빈자리는 크지 않았다. 엄마와 나 둘뿐이라는 게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엄마만 있으면 되었다. 엄마는 내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아니, 내가 엄마의 지지자였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평생 그래왔고, 그것이 익숙했고, 그래서 문제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더 자주 아빠의 부재를 실감했다. 엄마와 나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아빠가 없어서’라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다. 아빠가 있으면 엄마와 나 사이를 중재해줬을 테니까. 중.고등학교 시절, 혼자 독일에 남아 힘들게 학교를 다니며 생활해야 할 때도 문득 이 모든 시련이 ‘아빠가 없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아빠가 있으면 이만큼 고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우울증에 걸렸을 때도 그랬다. 아빠가 있었으면 내 삶이 달라졌을지 모르니까. […] 물론 아빠가 고의로 나에게 결핍을 안겨준 게 아니라는 것은 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그저 엄마는 자신의 의지와 의도대로, 아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예술가에게 필요한 두 가지를 선물한 것이다. 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또한 결핍으로 텅 비어 있다. 한때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들었지만 이제 나는 두 가지 모두가 나라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이루는 큰 축이라는 것을 안다. 울프 횔셔 교수님이나 심사위원들이 내게 ‘귀하고 드문 음악’을 품고 있다고 극찬했던 이유는 어쩌면, 다섯 살 때 이후 내 삶에 뿌리내린 열정과 결핍이라는 극단적인 양면이 내 음악에 스며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닐하우스 속의 바이올리니스트 / pp.79~88
어느 날 아저씨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진짜 좋은 게 있는데 연주나 한번 해볼래?”
그는 악기점 깊숙한 곳에 놓인 금고에서 바이올린을 꺼내왔다. 검붉은 빛의 묘한 색상을 가진 악기였다. 일부러 색을 그렇게 칠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색깔이었다. 생김새는 배불뚝이 형상이었는데 그런 모양의 악기들은 1700년대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저씨가 악기를 꺼내는 순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바로 그 악기라는 것을.
악기를 잡자 자연스럽게 손에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바이올린에 조심스럽게 활을 갖다 대었다. 아직 본격적인 연주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때까지 내 연주에서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환상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법에 걸린 빨간 구두를 신고 멈출 수 없는 춤을 추던 동화 속 소녀의 기분이 이랬을까. 연주를 시작하자 내 의지로는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브라보’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손은 평소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는데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전혀 달랐다.
“이게 뭐예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과르니에리.”
“이건…… 얼마예요?”
대답을 듣기도 전부터 나는 울상이 되었다.
“이 모델은 좀 저렴해요. 100만 달러 정도?”
꿈의 명기를 만나기 위한 관문, 콩쿠르 / pp.79~88
비단 악기 콩쿠르뿐 아니라 그때까지 내가 나갔던 모든 콩쿠르가 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항상 밤 기차 안에서 잠을 잔 뒤 아침에 도착하도록 일정을 짰고,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무대에 올라갔다. 식사는 내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가끔은 내가 무대에 오르기도 전부터 경쟁자들에게 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전날 도착해서 좋은 음식을 먹고 편안한 숙소에서 잠을 잤다. 충분히 컨디션을 조절한 뒤 최상의 몸 상태로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물론 때로는 할머니, 할아버지, 형제자매들까지 따라와 치열한 응원전을 벌이기도 했다. 내게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번 콩쿠르에서 꿈에 그리던 과르니에리를 탈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린, 악보, 도시락, 물, 거기다 무대에서 입을 드레스와 구두, 화장품까지 나는 온갖 짐에 짓눌리다시피 하며 밤 기차를 타러 카를스루에 역으로 갔다. 한겨울보다 더 바람이 매서운 2월이었다. 찬바람이 사정없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플랫폼에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과르니에리를 받게 해주세요. 아니, 받게 해주실 걸로 믿어요. 과르니에리를 받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기도의 내용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염원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그 악기를 받도록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중얼중얼 기도를 하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심하도록 별이 총총한 밤이었다.
꿈의 명기를 만나기 위한 관문, 콩쿠르 / pp.95~96
내가 가장 자신 있던 곡, 내 레퍼토리 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칭찬했던 곡, 바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와 파르티타〉가 내게 끔찍한 악몽으로 남았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아이러니한 일이다. 손가락이 딱 멈췄다. 완전한 정적이었다. 연습이 아니었다. 물론 꿈도 아니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든 채 멍하니 객석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내 첫 국제 콩쿠르 1차 무대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단순히 손가락이 멈춘 것도, 음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완연한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몸과 정신이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완전한 블랙아웃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무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디에서 멈췄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망연자실 객석을 바라보았다. 경연이 열리는 공연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공개 레슨 때 심사위원장에게 칭찬을 받으면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몸은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데 청각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웅성거림, 헛기침 소리, 말소리, 그 작디작은 소리들이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심사위원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있었고, 관객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연주를 마쳤는지, 어떻게 무대에서 내려왔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연주를 하다가 막히거나 잊어버리는 상황은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그런 실수를 하는 것을 봐도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음악은, 특히 바흐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기억해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곡을 연주하는 데 필요한 모든 움직임이 내 근육에 새겨져 있었다. 무대 위의 블랙아웃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