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도 더 추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언어는 일상 속에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주어진 당위적 실체로 받아들여져 왔다. 또한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기 이전에 이미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는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소피스트적 질문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언어가 없었다면...?”이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대답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언어의 원천과 구조에 대한 질문을 기능적 효용성에 대한 대답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가 없었다면...?”이라는 질문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할 때 유효하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 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자 할 때 많이 사용하는 화두이기도 하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영화도 언어의 소통적 중요성을 바탕에 깐 영화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불을 발견하여 신석기 문명을 열었고, 컴퓨터의 발명으로 정보화 문명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문명은 이처럼 새로운 것의 발견 또는 발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발견도 발명도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운 문명을 여는 열쇠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없었다면, 문명이란 것이 가능했을까?(Is it possible to achieve the civilization without languages?)”라는 가정이 성립되는 것은 인류 문명에서 언어는 공리적(аксиоматический) 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에 대해 생각할 때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이어 떠오르는 의문점 중 하나는 “인류는 왜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언어를 사용하는가”이다.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다면 문명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랐을 수도 있다. 아마 전쟁의 빈도도 훨씬 줄어들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은 언어의 발생론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20세기 이전에 많은 학자들이 밝히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후 묻지 않는 것이 정석이 되었다. 그 일례로 1950년대 스탈린 시대 구소련에서는 마르(Marr)라는 학자가 모든 언어는 중앙아시아의 카프카즈 지방에서 유래되었다는 야페트 이론(Яфетическая теория)을 내놓아 소련의 언어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이론에 반대하는 학자나 교수들은 당시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스탈린 자신이 카프카즈의 그루지아 출신이라는 것이 이 이론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잘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마르주의(Марризм)가 러시아 언어학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건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 언어의 발생에 관한 논쟁은 발견되지 않는다.
언어의 발생에 대해 그래도 궁금한 사람에게는 기독교의 성서를 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언어가 인간 탄생 이전의 문제라는 것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성서에는 인간의 언어가 지금과 같이 다양해진 이유는 인간의 오만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과 욕심을 꺾기 위해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인류 문명에서 언어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가 되었지만 어떻게 인간이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대신 도구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언어의 구조에 대한 질문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어 이제는 중요한 학문 분야 중 하나가 되었다.
언어는 보통 물질적 측면(energeia)과 정신적 속성(ergon)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간주된다. 이것은 동양철학의 논쟁 중 하나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동일한 맥락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 Essence of language = ergon(정신) + energeia(물질)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언어는 물리적 구조(физическая структура, physical structure)와 생리적 구조(физиологическая структура, physiological structure), 그리고 심리적 특성 (психологический характер, psychological property)으로 구분된다. 우선 물리적 측면에서 언어는 공중에 떠다니는 공기가 움직여 만들어지는 파장 (волна)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파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따라 언어의 소리가 구분된다. 따라서 이 파장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언어를 쳀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최근 로봇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이러한 연구에서 이루어진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로 언어는 인간의 신경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어의 습득, 운용과 장애가 모두 신경조직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언어 능력과 관련된 신경 조직의 발달이 늦어지면 언어 습득이 늦어질 수 있다. 또한 신경 조직에 손상을 입으면 언어 능력에 장애가 발생하여 말이 어눌해지거나 정확한 발음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최근에는 언어 능력과 신경 조직의 관계를 생리적으로 설명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언어치료라는 영역이 새로운 중요한 직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것은 언어학과 생리학이 함께 거둔 학제간 협동의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언어와 심리학의 관계는 최근 들어 왕성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변화는 언어의 음성적 구조, 통사적 구조, 의미적 구조 모두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되고,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심리언어학, 의미론, 화용론 같은 분야가 발전하고 있다.
본서는 언어 구조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음성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언어는 문자를 가지고 있다. 문자를 만드는 시점에서 발음과 문자는 일치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둘 사이에는 격차가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영어의 경우 문자와 발음의 차이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어휘에 발음 기호를 붙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어는 예측 가능하다.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문자와 발음 사이의 간격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9세기 말 키릴과 메포디 형제가 불가리아 지방의 현지어 발음을 바탕으로 그리스어 자모를 응용하여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키릴 문자이다. 오늘날에는 서 슬라브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슬라브 국가가 이 문자를 기본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대제(1708년)와 혁명 직후(1918년) 두 차례에 걸쳐 문자 개혁이 있었다. 이 개혁은 발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문자 몇 개를 문자 체계에서 제거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러시아어 정음 체계는 발음과 문자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도록 짜여져 있다. 이 간격을 연결시키는 고리는 발음 규칙이다. 발음 규칙은 러시아어의 문자 체계를 이해하는 첫 번째 길목이다. 본서는 발음 규칙을 이해하는 전 단계로서 음성 구조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음성 구조를 이해하면 문자와 발음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 발음 규칙을 제시한다. 이러한 발음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 현상과 차용어에 관해서도 일정 부분을 할애한다.
러시아어는 본래 음운 체계 중심의 언어였다. 지난 천 년 동안 러시아어는 음운 체계를 내재화하면서 형태 체계 중심으로 언어의 특성이 변화하였다. 형태적 구조 안에서 음운 체계나 발음 구조가 어떻게 바뀌는지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본서는 음성 구조의 분석에서 출발하지만 음운 체계의 운용과 형태 체계와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본서는 “러시아어 음성학”(강덕수 저, 1993)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각도에서 집필하고자 하였다. 지난 10여 년 넘게 러시아 어 음성학과 음운론, 그리고 형태론을 강의하고 연구하면서 통합적 관점의 교재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성민 박사와 공동 집필을 하게 된 동기이다. 최근 컴퓨터의 발전으로 실험 음성학의 연구 방법 또한 발전하고 있다. 본서에 이런 측면을 보완하여 러시아어의 음성학적 연구를 좀 더 활성화하는데 기여하고자 하였다. 본서에 사용된 스펙트로그램 등 음성학 자료는 변군혁 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본서의 출판이 러시아어 음성, 음운, 형태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스펙트로그램 등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 변군혁 박사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본서를 출판해 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 감사드린다.
--- '서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