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오지 않아.’
이 세 단어가 순서대로 기도문을 이룬다면 매일 밤, 밤이면 밤마다, 밤이 샐 때까지 이 말을 되뇌는 나는 분명 지금쯤 흰 날개 달린 신성한 천사는 아니어도 세속의 성자쯤은 됐을 것이다. 열 살 때부터 그랬다. 내 기억에 처음으로 남은 불면증은 초등학교 3학년 긴 겨울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중반 뉴브런즈윅 시골의 깜깜하고 고요한 2월이었다. 그 시절 그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빛 공해나 소음 공해는 아마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나는 작은 트윈베드에 누워 있었다. 코를 골아대는 형 옆에 누워 다른 방에서 들리는 부모님 말소리에, 늘 켜져 있지만 들릴 듯 말 듯하던 텔레비전 소리에, 유령이나 악령 혹은 그 무렵 나를 사로잡았던 괴물(그게 무엇이었든)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를 닦고 아버지가 볼일을 본다. 어머니가 허둥대며 잠옷을 찾고 아버지는 이미 잠근 문과 창문을 다시 확인한다. 어머니가 온도조절장치를 만지며 법석을 떨고 아버지는 강박적 성격의 소유자답게 문과 창문을 다시 확인한다. 곧, 모두 조용해졌다. 무시무시하게, 나를 비난하는 듯 고요하다. 모두 잠들었다. 대체 나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잠을 못 이룰까?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인가? 아니면 혹시 내가 마법에 걸렸나? 귀신 들리거나 악령에 사로잡히기라도 했나? 공포영화나 교훈성 이야기를 보면 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은 끔찍한 결말을 맞거나 밤에 납치된다. 아니면 그 아이들이 바로 악마의 씨앗들이다. 자정이 왔고 곧 지나갔지만 나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죄책감과 두려움, 분노 속에서 고치처럼 담요로 나를 더 단단히 감싸려고 애를 썼다. 이제 보니 어릴 적 나는 어둠을 두려워했다. 아이들은 하나도 깨어 있지 않은 늦은 밤, 작은 소음이 복도를 따라 울리고 졸졸대는 배수관 소리가 유령처럼 들리는 시간에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밤이, 밤의 적막이 싫었다. 그리고 여전히 싫다.
--- p.9-10
그러나 요즘의 불면증은 끊임없는 연결성이라는 환상(과 그 환상이 낳은 왜곡된 야망의 초상)을 동반하긴 하지만 유쾌한 로큰롤 에너지 그리고(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음울하고 사색적인 꿈 풍경은 가지고 있지 않다. 불면증 환자들은 더이상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 중독자들이다. 그들은 예민한 건강 염려증 환자처럼 자신들이 얼마나 피곤한지 투덜대는 동시에 늦은 밤 자신들의 질병에 탐닉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홀로(또는 자신이 고른 많지 않은 사람들과 흥청대며) 밤을 지새우던 지난 세대의 불면증 환자들과 달리 요즘의 불면증 환자들은 잠들지 않는 초연결 사회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잠을 이룰 수 없고 테크놀로지는 잠을 이룰 수 없는 모든 이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건강과 정상적인 삶의 밑바닥으로 내리달리는, 거꾸로 된 경주가 창조된다. 잠을 가장 적게 자는 사람이 승자이자 패자가 된다.
--- p.36
이렇게 끔찍한 하지불안증후군에 걸린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는 하루에 세 시간을 자면 성공한 날이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예민해졌다. 치즈가 무척 당겨서 500그램씩 먹었다. 네 달 만에 13킬로그램이 불었다. 하지불안증후군 때문에 잠복해 있던(그러나 그다지 잘 숨겨져 있지는 않았던) 내 강박행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상적인 두려움과 불안들이 표면으로 떠올랐고 잠금장치와 냉장고 문, 전등 스위치, 손 씻기를 두 번 세 번 확인했을 뿐 아니라 매일 쇼핑하며 순간적 흥분과 후회, 반복 충동을 느꼈으며 바보 같은 물건들을(대개 기념일이나 특별한 시즌과 관련된) 수집하고는 며칠 뒤에
버리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은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 훔치기 시작했다. 좀도둑질은 범죄다. 하지만 강박행동이기도 하다. 나중에 의사와 이야기하다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불면증 때문에 강박행동이 생기기도 하고, 강박행동 때문에 불면증이 생기기도 한다.
--- p.50-51
어쩌다 불을 끄고 나서 네 시간 미만으로 잠을 잘 때도 있다. 어쩌다 몇몇 밤은 그렇다. 많다고는 말할 수 없고 결코 충분치 않다. 내 불면을 치유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피곤한 상태로 지내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내 몸에 서성일지 모른다. 불면증 때문에 수명이 짧아질까? 당뇨병, 골다공증, 암, 발기부전에 더 쉽게 걸릴까? 자전거를 부주의하게 타다가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불면증이 장기적으로 내 일에, 내 지적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내 비평가들이 이 질문에 답해줄 테니 그들에게 물어보라) 이제 쉰 살이 되고 보니 쉰다섯 살, 예순 살 그리고 그 뒤로 내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늙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늙고 추레한 것은 또다른 문제다. 마지막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내게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나는 불면증 환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는 아는 사람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다. 잠이 부족한 모습은 분명 숨길 수 없다.
--- p.59-60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D가 내게 말했다. “전화가 계속 울렸다네. 심지어 새벽 3시에도 울리더군. 내 동거인이 새벽 4시쯤 전화를 꺼버렸지. 하루 뒤에 정신을 차려 보니 메시지가 56통 들어와 있었어. 대부분 광고주가 보낸 메시지였고 상사가 보낸 것도 몇 통 있었지. 언제쯤인지 모르지만 내가 광고주에게 무척 피곤하다고 했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했나, 하는 메시지를 보냈어. 그런데도 광고주는 광고에 대한 아이디어와 수정 사항, 질문을 계속 보냈더군. 광고주가 사는 그 도시도 한밤중일 텐데 말이야.”
D가 계속 말을 이었다. “잠시 쉬고 몇 시간 뒤에 이야기하자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특히 내가 그런 사람이야. 나는 새벽 1시에도 기꺼이 일을 하거든. 할 수만 있다면 문제를 수습할 준비가 언제든 돼 있지. 그런 상황이 이상하거나 폭력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어. 오히려 아주 정상적인 일로 생각했지. 왜냐면 내가 보통 그렇게 일하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광고 프로젝트가 데드라인이 없는 일이었다는 거야. 조금도 급하지 않은 일이었던 거지.
--- p.99
나는 서구 문화가 불면증을 현재의 삶, 적어도 성공적인 삶의 대가로 인정하려 한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을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이 가득한 세상은 내게 끔찍하다.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끔찍할 것이다. 그런 세상은 태평하고 즐거운 세상이 아닐 테니 말이다. 불면증 환자들이 운영하는 세상은 체념하는 세상이다. 어려움에 맞설 힘도 없고, 가벼운 자극 이상의 그 무엇이 되거나 그 무엇을 창조할 욕망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다. 또한 이상하게도 위안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폭신한 옷감과 자신도 모르게 몸을 까닥거리게 만드는(그러나 결코 춤추도록 만들지는 않는) 경쾌한 음악, 거품 목욕과 깨끗하고 상큼한 향기가 있는 세상이다. 권태로운 지옥이다.
---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