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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1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540g | 150*210*19mm
ISBN13 9791186619056
ISBN10 118661905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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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몇 시쯤 됐을까요?"
"일부러 저녁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려고 했으니까 아침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였을 거예요. 뉴욕은 저녁 일곱시 정도 됐었겠죠?"
"지금도 미국 쪽과 일을 하시나요?"
"네. 북미와 유럽 쪽 사람들을 만나긴 합니다. 출장은 아주 가끔 가죠."
형사는 십삼 년 전 일을 참 자세히도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케이 씨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누구죠?"
여자는 의자에서 등을 떼어낸 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사슴같이 긴 속 눈썹, 일부러 조각이라도 한 것 같은 둥근 서클에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여자의 커다란 눈이 잔잔한 호수같이 너울거렸다.
"제이라는 분입니다."
남자는 수첩을 덮었다.
"제 남편이라고요? 저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정말이죠?"
"실례 많았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지만 서에서도 이런 사건은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미 종결된 사건이고 워낙 엄청난 사건이었으니 말이죠. 재수사가 아니라 형식적인 자료수집이니 부담을 안 가지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의뢰인」중에서

희선씨는 언니 명의로 된 카드를 썼더군요. 혹시나 해서 건물구조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상식과는 조금 다르게 되어 있었는데, 401호는 특실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방의 두 배 정도 크기더라고요. 402호와 403호의 문은 붙어 있었습니다. 문이 붙어 있다는 건 구조가 대칭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402호의 화장실이 왼쪽에 있으면 403호의 화장실은 오른쪽에 있는 거고, 침대와 침대 사이에는 벽 하나만 존재 하는 거죠, 404호와 405호도 똑같은 구조였습니다.
"이런 미친!"
붉으락푸르락해진 제이의 얼굴이 거친 단어와 잘 어울렸다. 형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형사의 모습도 흔들리고, 불빛도 흔들렸다.
오금을 접고 앉아 두 팔로 두 다리를 잡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희선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다 제이가 눈을 감자 여자는 고개를 들고 제이를 쳐다봤다. 슬프게 보이던 눈망울은 갑자기 흰자를 보이며 뒤집혔고. 곧이어 검붉은 피눈물이 굵게 두 줄기를 이뤘다. 제이는 눈을 다시 뜨려고 해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너무 친한 친구들」중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이는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여기서 끝냈으면 했다. 다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시간을 잃어버리면 다시는 보상 받을 수 없다. 무엇을 잘못 했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난 건지…
아주 가끔씩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들이, 빗물을 훑고 멀리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남녀와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흐느끼는 소리만 적막을 질투할 뿐. 바퀴에 감기는 빗물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환한 빛과 함께 다가왔다. 그녀 뒤에서 빛과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누군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누구일까? 반드시 이렇게 잔혹하게 끝내야하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아름다웠던 추억을 땅에 묻어버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에 잡힐 만큼 시커멓고 거대한 괴물이 돌진해왔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운전자의 형체가 검은 그림자로 보였다. 기억이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케이, 그녀의 이름을 빼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로…
---「흔적을 찾는 남자, 흔적을 지우는 여자」중에서

이불이 느리지만 서서히 들썩였다. 슬픔을 삼킨, 서럽고 또 서러운 눈물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방안, 거미줄이 매워 놓은 외로운 구석구석까지 슬픔과 분노로 채워지고 있었다. 절망에 상처를 얹고 상처 위에 다시 칼자국을 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쓸모없는 인간. 눈 깜짝하는 것보다도 짧은 순간, 티끌만큼 남아있는 희망조차도 발로 짓밟아버린 쓰레기 같은 인간…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제이는 힘없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십 년을 알았고, 칠 년을 같이 산 사람이다. 빛은 숨겨도 소리의 향기는 감출 수 없다. 여자의 실루엣이 한번 움찔하고 절망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방안에 있는 모든 물체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고개 숙인 남자는 고통을 눈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눌러 삼켰다. 만약 피를 토해내어 오장육부를 꺼내 뱉을 수만 있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과 흔쾌히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뼛속까지 절망이 번져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아는 여자」중에서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다. 감옥에 갇혀 있는 여자는 뻥 뚫린 하늘을 보고 멈추지 않는 장대만큼 길고 머리카락처럼 얇은 바늘 빗물을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다. 감옥 문을 열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고 뒤를 돌아 밑을 내려다보면 코끼리만 한 악어들이 몸뚱이를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촘촘히 붙어 내장에 붙어 있는 물고기 가시가 보일만큼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한 발자국 옮기면 바닥이 끝나서 허공과 만나고 있고 그 바닥은 영원히 녹지 않는 불같이 차가운 얼음이었다. 간수가 찾아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의 알몸을 보고 있노라면 여자는 그래도 수치스러운지 많이 자란 머리카락을 이빨로 뜯어내 중요한 부위를 가린다. 간수가 하루에 한 번씩 던져주는 식사는 시체의 피부를 벗겨 피 냄새가 사라지고 곰팡이가 날 때까지 정성들여 보관해 둔 늙은 노인의 살점이다. 시궁창 냄새가 온몸을 감싸고 추악하고 비열한 웃음에 애벌레 한 움큼을 잘근 잘근 씹어 나온듯한 진득한 침을 질질 흘리는 간수는 물대신 고드름 같이 차가운 바늘을 여자의 팔뚝에 꽂고 여자가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아가리로 씹어 먹는다. 그래도 여자는 감옥 문이 잠겨 있지 않아도 문을 열고 나가지 않고, 악어에 몸을 던지지 않으며 곰팡이 냄새가 나는 살점을 이틀에 한 번은 눈을 감고 꿀떡 삼킨다. 옆을 보면 비웃고 있는 케이가 보이고 반대편을 보면 제이가 보이고 눈을 감으면 바다가 보였다.
---「내가 아는 여자」중에서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이… 당신 아내가 느꼈던 그 잔혹한 질투를 내가 스스로 만들고, 그런 비참함 속에서도 단 일초라도 원하는 감정을 빼앗아 오고 싶어서…
사랑은 잠시 쉬었다 가는 거라고, 그 짧은 시간에 느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많겠냐고… 더 가혹하지만 제게는 순간이었네요. 그렇게 짧은 순간이었어요. 미안해요. 내가 당신 아내를. 당신 아내가 나를. 그리고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잘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소중한 거예요. 부디 다시 행복한 가정 이루길 바랍니다. 진심이에요."
여자의 발이 신발 위로 올라갔다. 여자는 아주 서서히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남자는 생각한다. 단, 단 한마디라도. 하지만 중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한마디 소리조차 내뱉을 수 없다. 목이 터질 것 같이 힘을 주어 소리를 끌어올려도, 뒤통수가 뜨거워질 정도로 그녀의 이름을… 문이 열린다. 네모난 문이 여자의 몸을 빨아들인다. 문이… 이젠 정말 마지막인데. 문이…
“케이! 헉헉…"
숨을 토해낸다.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양쪽에서 밀고 나오는 문이 그녀의 모습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습을…
"케이! 케이! 헉헉“
---「사랑 그 지긋지긋한 아이러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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