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그녀는 조선시대에 거상(巨商)이었다. 여자이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라고 거창하게 얘기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덕은 양인출신이었다. 마진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부모를 잃고 기생이 되었다. 기생은 엄밀히 얘기하면 노비의 일종이다. 보통의 노비가 몸으로 공역을 담당하는 반면, 기생은 춤과 노래로 공역을 하는 것에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기생은 그 세가 대단하여 양반들도 뇌물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기생을 계속 하더라도 배고픔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덕은 밥을 굶으면서까지 제주 목사를 계속 졸라서 드디어 양인이 되고 객주를 차려 돈을 벌었다. 그 당시 사회여건을 감안할 때, 대단한 일이다.
『만덕전』을 쓴 채제공에 따르면 만덕은 돈을 버는 재주가 출중했다고 한다. 출중하다는 구체적인 이유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은 그녀가 유통의 혁신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제주에서 나는 물품이 강경까지 가는 데는 나주나 영암에 도착하여 말을 타고 가는 방법이 유일했다. 하지만, 만덕은 칠산 앞바다라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배로 강경까지 물건을 운반하였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배를 이용하였으니 물품을 싼 가격에 대량으로 유통할 수 있었다. 다른 상인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 동안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되었던 블루 오션(Blue Ocean)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돈을 번 만덕은 갑인년 극심한 흉년이 조선을 강타했을 때,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을 털어서 제주의 백성을 구휼했다. 어렵게 번 돈이니 돈에 대한 애착이 컸을 것이지만 만덕은 그 애착을 벗어났다.
그 당시 상황은 참혹했다. 조정에서 구휼미를 보내주었으나, 추자도에서 구휼미를 실은 배가 침몰하여 제주도는 죽음의 섬이 되어 버렸다. 시체를 먹고, 아이를 먹고도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갑인년 흉년에도 살아남았는데, 라는 말이 남아있을까.
최근,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어려운 만큼 빈곤한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고통은 클 것이다.
그들은 충격에 대한 저항계수가 부자에 비하여 훨씬 낮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가장 소중한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이럴 때에 만덕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절박감은 훨씬 덜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이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기탁하는 사람이 신문과 방송에 등장한다. 하지만, 부자가 기탁했다는 보도는 흔하지 않다.
최근에, 20대 여성들의 자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것이며,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었다. 어렵게 대학을 나와도 비정규직뿐이고, 대우도 좋지 않으니 상실감이 커서 자살한다고 한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꿈을 가꾸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정열을 불태워도 모자랄 나이에 절망과 우울증에 함몰되어 죽음으로 가는 마차를 타다니….
20대 여성들이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몹시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조선시대 칠반천역(七般賤役 : 조선에서 신분적으로 천대받던 7계급)중의 하나였던 기생이었고, 제주 여성은 육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월해금법(越海禁法)이라는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큰 부자가 되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 여장부 김 만덕을 기억하라. 적어도 그대들은 그녀보다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60에 이르는 나이에 정조를 알현하고 한양에 간 김 만덕이 당시 조정의 권신들의 작태를 보고 한 밤의 자객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쓴 소리를 했던 기개를 기억하라. 그녀는 아직도 남녀차별이 심해 이 나라에 소망이 없다고 불평하는 대신에 직접 ‘행동하는 양심’의 소유자였다.
또 하나, 정조가 화성건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화성의 상권을 일으키고, 거기에서 나온 이익을 모두 당시 재정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화성건설현장에 보냄으로써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이 된 화성건설을 앞당긴 그 열정과 헌신을 기억하라. 그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한 ‘영원한 청춘’이자 서번트 리더쪽의 화신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글은 소설이니 소설 이상으로 보지 말았으면 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