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지크프리트, 용의 피를 향한 욕망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유전공학의 새로운 영웅들을 독일 신화에 나오는 인물인 지크프리트와 비교하면서 논의의 포문을 연다. 이어서 곧바로 그런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될 뻔했던 황우석을 거론하기 시작한다.
용을 죽인 사나이인 지크프리트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덕분에 세계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는 용을 죽이기 전에 용의 피로 입술을 적신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자연의 말을 알아듣는다. 새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되면서 “용의 피를 마신 게 도움이 된 걸까?” 하고 자문한다. 21세기의 생명과학자들도 그와 비슷한 착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생명의 책인 DNA를 해독했고, 이제 모든 괴물과 위험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지크프리트를 ‘미래의 인간’이라고 칭했다. 오늘날의 생명과학자들은 그런 ‘미래의 인간’이고자 한다. 그러나 고통이 전혀 없는 세계에 대한 꿈은 곧장 고통스러운 정신적 독재의 악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차분히 일깨운다.
2장. 황우석의 몰락
황우석 사태의 발단과 경과, 최근 상태(2006년 7월까지)를 놀랍도록 자세하게 보고한다. 황우석의 발언이 다수 인용되며, 그런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논의도 곁들여진다.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되짚어보는 대목도 있고,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도 있다.
3장. 끈질긴 유토피아
지은이는 생명공학이 내세우는 사상이 다름 아닌 낡은 유토피아 사상이라고 진단한다.
하이든의 오페라 <달의 세계>, 초기 사회주의 쾌락주의자 샤를 푸리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캄파넬라의 『태양국가』 등을 열거하며 유서 깊은 유토피아 사상을 설명해나간다.
이어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노바 아틀란티스』에서는 ‘과학자들(솔로몬의 집)의 통치’가, 『태양국가』에서는 ‘형이상학자’의 통치가 주장되었고, 일찍이 플라톤도 철학자의 통치를 주장했음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유토피아들은 기술이 지배하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결국 최후로 남은 유토피아적 힘은 과학기술이다.
18세기 후반기부터 구체적인 시점이 명시된 미래의 유토피아가 등장해 유토피아의 종말론적 성격, 다시 말해 종교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곧이어 유행한 역사철학과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정신에 관한 강론』(1844)은 미래 유토피아 사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콩트는 ‘우리의 성숙한 이성’을 찬양했고, ‘인류 지혜의 정말 근본적인 교리는 진보’라고 주장했다. 한계를 넘으려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과학기술과 유토피아, 실험과 종말론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그 뿌리는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지배에 대한 믿음이다. 오늘날 과학은 유토피아를 지키는 사제가 되었다. 생명공학자는 21세기의 유토피아론자다. 생명공학회사 ‘어드밴스드 셀 테크놀로지스’, ‘크로모소마’ 따위는 “미래는 더 이상 꿈이 아니다”라고 외친다. ‘행복 작전!’(성형수술)이 성행하고 온갖 ‘향상’(enhancement) 프로그램들이 난무한다. 애초부터 유토피아 사상은 ‘자기초월의 경향’을 포함하지 않았던가.
4장. 윤리위원회의 급증과 다양해진 도덕
이어서 지은이는 영미권 중심의 생명윤리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윤리전문가들은 최소윤리를 정립하려 애쓴다. 2002년 5월, 함부르크에서 ‘트렌드의 날’(trend day) 행사가 열렸다. 모든 것이 유행이 되었다. 21세기 윤리전문가들은 클럽윤리와 최소윤리, 수많은 소집단들을 위한 규칙과 사업 파트너들 간의 유연한 규범을 정립하느라 바쁘다.
1970년 미국에서 ‘삶의 질’ 개념이 삼류잡지에 등장했다. 영미권은 아방가르드 윤리학의 산실이다. 지금은 영미권의 가치가 중부유럽을 접수한 상황이다. 영국의 로버트 마이 경(왕립학회장)은 독일을 지배하는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회의론을 비판했다. 그런데 그의 추론을 자세히 보면, “할 수 있다”로부터 “해야 한다”를 도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새로운 윤리와 유토피아의 만남은 이미 1962년에 있었던 줄리언 헉슬리의 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줄리언 헉슬리는 1957년작 『새 포도주를 위한 새 부대』로 ‘진화론적 윤리학’에 기초한 초인본주의를 정립했다. 그에 따르면 “진화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이 인간의 윤리적 과제다.” 피터 싱어와 존 해리스는 국제화된 영미 윤리학의 스타들이다.
영미 윤리학의 시조인 베이컨, 로크, 흄을 돌아보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미래로’라는 구호로 의식의 혁명을 일으켰다. 베이컨 사망 6년 후에 태어난 로크는 1704년에 영국의 국가철학자로 임명되었으며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러하다. 그는 소유권 지상주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창했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가 지닌 본유관념은 ‘쾌락을 향한 욕망과 고통에 대한 꺼림’뿐이다. 로크 사망 7년 후에 태어난 흄은 이해관계(interest)를 도덕논의에 도입했다. 흄에 따르면, 옳은 처신은 모든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돌아보는 처신이다.
하버마스는 영미권의 ‘자유주의 유전학’을 비판한다. 그는 출산 전 배아선택은 선택된 자에게서 온전한 자신만의 미래를 앗아간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선택된 자는 선택하는 자를 디자인할 수 없으므로, 출산 전 배아선택은 상호주의 원리를 깨뜨리고, 민주주의를 깨뜨린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로널드 드워킨은 “부모는 아이를 유전학적으로 최적화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1921년에 유럽 자연과학과 신기술 윤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대륙 대표자들은 인간존엄(자기의무)을 최고로, 영국 대표자들은 자율(자기규정)을 최고로 두려 하여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결국 위원회는 각국에 결정을 위임하고 말았다. 오늘날의 세계는 황우석 사태에 굴하지 않고 줄기세포연구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삶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5장. 그렇다, 문제는 생명이다―독일, 유럽, 세계
5장에서 지은이는 이른바 ‘생명과학’이 마치 종교처럼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수준으로 격상된 것을 비판한다. 윤리학을 넘어 철학 전반에서 생명과학 사상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2001년은 ‘생명과학의 해’였다. 인간을 보는 관점이 변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은 과학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한 생명과학자는 말했다. 생명과학의 해 기념 국제학회 논문집은 2002년에 독일 생물학자 연합과 독일 정부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여행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생명과학들의 대화』였다. 그 여행은 종교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생명과학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개념화할 수 없는 대상을 제 몫으로 선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이다. 도대체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과학’회사란 바로 거대 제약회사를 의미한다.
독일 생물학자 후베르트 마르클은 ‘자유, 책임, 인간존엄성―왜 생명과학은 생물학 이상인가’라는 제목의 연설로 이러한 세태에 경종을 울렸다. 세계 곳곳에서 불임치료 산업이 번창하고 있으며, 동유럽 여성들은 2004년에 약 250달러를 받고 난자적출에 응했다. 반면 미국은 인권을 추구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