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삶의 루트가 정해져 있죠. 졸업하면 취업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아이 낳고……. 저는 취업을 제외한 나머지 과정이 조금 늦었어요. 서른여섯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주변에서 애부터 낳으라고 했지만 별 생각이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도 어려웠고요. 어머니가 아프셔서 병간호를 해야 했고, 아이 생각도 간절하지 않았죠.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 아이를 낳아도 맡길 사람도 없었고요. 주변의 걱정도 한 귀로 듣고 흘렸어요. 그런데 몇 년 후 결정할 시기가 오더군요. 안 낳는 건 상관없지만 낳고 싶으면 나중에 못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후회라기보다 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혼 전까지 임신은 굉장히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원 나이트 스탠드’로 아이가 생기는 설정에서 출발한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많아서인지 ‘성관계=임신’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가 괜히 드라마고, 영화가 괜히 영화겠는가. 마흔 넘어서의 임신은 그렇게 수월한 게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간절함이 컸던 만큼 더 어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아기를 갖기로 결심했으나, 한동안은 무슨 짓을 해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단언컨대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이 결혼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부모가 될 마음이 있는 만혼 남성이라면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삶의 전반을 ‘아기’에 맞춰야 한다. 금주와 금연은 당연한 일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으로 컨디션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병원에서 점지해준 ‘그날’을 위해 만사를 제치고 달려올 수 있는 결단력(!)과 체력도 필요하다. ‘대충 이제까지처럼 살다가 어찌어찌 아이가 생기면 낳겠다’는 식은 20~30대에나 가당한 일이다. 그렇다. 이제는 그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배 나오고 엉덩이 처진 40대고, 40대 남성이 아빠가 되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결실은 노력한 만큼 얻어진다. 고시생 머리띠에나 새겨질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아기를 갖기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면 할수록 후회도 크다. 반대로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며 준비하면 후회할 일이 줄어든다.
이튿날 확진 판정을 받으러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그동안 호르몬 수치가 더 올랐고, 초음파기에 조그맣게나마 아기집이 보였다. 그 흔한 입덧조차 없어서 긴가민가하던 차에, 기계를 통해 쿵쿵거리는 아기 심장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확신이 섰다. 정말 내가 정말 임신한 게 맞구나! 그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한 의사가 웃으며 “축하합니다. 임신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실감이 잘 안 났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아직 배가 불러오지도 않았는데 자꾸 손이 배 위로 올라갔다. 막달에 접어든 산모들처럼 두 손을 허리를 받치고 걸어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임산부로 살아가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했지만 정말로, 정말로 기뻤다. 종교가 없는데도 절로 기도가 나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엄마’로서의 삶을 허락해주셔서.”
양수검사 결과는 좋게 나왔다. 두려움이 한결 줄어든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만약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던들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아이를 지웠을까. 나에게 찾아온 이 작은 생명을, 단지 장애가 의심된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없앴을까. 함께 팟캐스트를 진행한 이형기 감독과도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해봤는데, 둘 다 “그럴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부모의 철학이 문제다. 어찌됐든 소중한 내 아이로 삼을 작정이라면, 앞서서 불안해 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의사에게 대체 언제 병원에 와야 하냐고, 진통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진통이 시작되면 다 알게 될 겁니다”. 신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을 듣고 돌아와 진통이 오는 그날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초 예민한 상태로 지냈다. 결국 나는 예정일을 이틀 넘겨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낳고 보니 무지가 공포를 키웠을 뿐, 출산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없거나 혼란스럽거나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 각인된, 출산에 대한 막연하게 부정적이었던 인식도 기쁘고 벅차고 감격스러운 경험으로 대체되었다.
아내가 출산 가방을 싸기 시작하면 때가 임박한 것이다. 이때부터 남편들은 진통이 오는 순간부터 출산까지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시뮬레이션 해봐야 한다. 특히 경험 없는 초짜 부부라면 남편이 침착해야 아내도 덜 당황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진통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니 술은 절대로, 반주로 한두 잔도 마시지 말아야 한다. 휴대전화는 항상 켜놓고, 배터리도 빵빵하게 충전을 시켜놓도록 하자. 자동차에도 기름을 가득 채워두되, 집 앞에 차가 빽빽이 들어선 골목이 있다면 차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플랜B’를 짜놓자. 새벽에 진통이 왔는데 일일이 차를 빼달라고 전화하다가는 급박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오한이 밀려왔다. 이불을 몇 겹씩 끌어다 덮어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몸이 부대끼면 이럴까, 내가 수술을 하긴 했구나 실감이 났다. 그래도 태명이가 무사히 태어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병실에서는 남편이 내가 너무 안돼 보였던지 우스갯소리를 들려주었다. “분만실 밖에 앉아 있는데 전광판에 산모들 이름이랑 현재 상황을 계속해서 알려주더라. ‘최정*(42), 분만 대기’ 이런 식으로. 그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딱 뜨니까 사람들이 술렁술렁 하더라고. 20~30대 산모들 사이에 40대 왕고참이 나타났으니까. 신입사원 모임에 부장님이 낀 격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축하해, 당신. 여기서 1등 먹었어.” 대체 나이는 왜 보여주는 거야!?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각자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 내 옆에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 나는 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고, 힘이 닿는 한 안아줄 것이다. 아프지 않게 돌볼 것이고, 혹여 넘어지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단단하게 키울 것이다. 나머지는 여력이 되는 대로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려고 굳이 애쓰지 않을 것이고, 공연히 다른 아이와 비교하여 내 아이를 마음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끝까지 잘 해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할 것이다. 환갑이 되어도 쿨하고 건강한 엄마로 곁에 있어줄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