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강사로 재직했으며,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과 이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너와 나의 목숨을 위하여》가 있고, 번역서로는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시집》, 릴케 《말테의 수기》, 《어느 시인의 고백》, 《릴케 시집》, 《릴케 후기 시집》, 헤세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시집》,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레마르크 《개선문》 등이 있다.
갑자기 소녀가 소리쳤다. “어머나, 이건 실제의 성모상이 아니군요.” 작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애태우고 있던 베르너는 의아스러운 듯이 눈을 들었다. 생쥐는 난처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보조개처럼 오목하게 오므린 귀여운 손으로 단단히 입을 가렸다. “어째서?” 하고 베르너가 물었다. “왜냐하면…… 잘 말할 수가 없어요.” 소녀는 말을 끊고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영특한 아가씨, 대체 누구로 보이지?”
“새하얀 방을 가지고 있어요. 벽이 밝아서, 바깥은 잿빛으로 흐린 날에도 햇살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바깥은 흐린 날이 많아요. 하지만 제 방은 언제나 밝아요. 창문에는 새하얀 무명 커튼이 있고, 그 뒤에 새하얀 꽃만 잔뜩 놓여 있어요. 작은 꽃이에요. 제 방에서는 완전히 피어나는 법이 없어요. 향기도 강하지 않고요. 하지만 모든 것에서 그 향기가 풍겨요. 제 손수건도, 제 베개도, 제가 즐겨 읽는 책도. 매일 아침 아가테 수녀님이 와서 살짝 미소를 짓습니다. 그분은 제 방에 올 때마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어요. 그리고 새하얀 수녀 두건을 쓰고 제 침대 옆에 앉지요. (중략)” ---「새하얀 행복」중에서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게, 헤르만. 하지만…… 자네는…… 그녀를 못 쓰게 만들 거야…….” 사이. 헤르만 홀처는 담배를 입에서 떼어 탁자 가장자리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가느다란 연기가 방 한가운데에서 꼿꼿이 피어오른다. 무의식중에 두 사람의 눈이 이 느릿하고 조용한 움직임을 뒤쫓는다. 이윽고 홀처는 의자 하나를 두 손으로 잡아서 들어 올리려고 한다. 그것을 갑자기 밑으로 떨어뜨린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외치듯이 말한다. “자네 돌았나?” “제발 조용히 얘기하자고…….”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다. 그러나 홀처는 아직 그렇게 흥분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그녀를…… 못 쓰게 한다…….”---「어느 사랑 이야기」중에서
어느 날 아침의 일입니다. 이 오른쪽 문 앞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그것이 죽음임을 알아차리고 급히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고는 하루 종일 문을 굳게 닫아두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죽음은 왼쪽 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자는 떨면서 문을 닫고 든든한 빗장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두 문을 여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 있는 것으로 살림을 해 나가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생활도 이전보다는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저장품이 날로 줄어들고 갖가지 근심사도 생겨났습니다. 두 사람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느 긴 밤이었습니다. ---「죽음의 동화」중에서
“인생이란 아득하게 먼 것이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은 아주 적어요. 영원한 것이 결국 하나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난 불안해지고 지쳐버립니다. 어렸을 때 나는 이탈리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잘 기억하진 못하나, 여하튼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길을 가던 도중에 농부에게 ‘마을까지는 얼마쯤 남았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반 시간쯤 남았지’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다음번에 만난 농부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하루 종일 걸었건만 마을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생도 이것과 같아요. 그러나 꿈속에서는 뭐든지 가까이 있거든요. 그래서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래 꿈에 맞도록 만들어졌으며, 삶을 위한 기관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물고기인 주제에 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해서 어떻게 한다는 것이죠.” ---「에발트 트라기」중에서
릴케는 현실을 초월하는 영혼의 음향을 전하고, 언어의 형식미를 탐구해 표현의 한계를 확대시킨 독일 시의 거장이기도 하지만, 여러 편의 훌륭한 소설들을 남기기도 했다. 세속과 경건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조각가의 이야기인 [모두를 하나로]는 삶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며, 우연한 것을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한 예술가의 고뇌와 갈등을 담은 작품이다. [집]은 뛰어난 어느 도안가가 2년간의 해외 견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겪는 기이한 체험을 담았다. [목소리]와 [구름의 화가]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펼쳐지며, [노인]에서는 한 노인의 관찰을 통해 그의 내면세계를 엿보게 된다. [새하얀 행복]과 [묘지기]에서는 각각 새로운 빛과 인물을 매개체로 일상과는 다른 뜻밖의 낯선 사건?세계와 조우하며, [대화]에서는 두 주인공이 예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특히, 신이 만든 세상을 뛰어넘는 예술을 주체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지미르의 예술관은 릴케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 외에 가난한 사랑 앞에 선 연인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결혼, 조건의 문제를 다룬 [어느 사랑 이야기]와 러시아 여행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힌 릴케의 흔적이 담겨 있는 [죽음의 동화], 미래의 삶을 지향하는 청년 릴케의 꿈을 담은 자서전적인 내용의 소설이자 《말테의 수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된 작품인 [에발트 트라기] 등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