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해박한 학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훗날 그의 말―철학은 문학화해야 하고, 문학은 철학화해야 한다는 것과 외국어 하나를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나라를 가지는 것과 같다―을 생각하면 그의 학문적 열의와 문학적 성과가 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문단을 문학 저널리즘이라고 봤을 때 저널리즘을 타기 전 습작 시대가 없었다고 말한다. 습작일 수밖에 없는 작품마저도 모조리 발표해 버린 것이다. 이는 그가 처음 소설을 쓰게 된 경위부터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955년 우연히 부산에 놀러갔다가 부산일보의 편집국장과 논설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에 의해 “이 교수가 한번 써보라”는 권유에 취중의 호기로 대답한 것이 <부산일보>에 연재한 첫 소설 『내일 없는 그 날』을 쓰게 된 동기였던 것이다.
그는 애초에 소설을 쓰려는 마음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가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더듬어 볼 때 그가 소설가가 된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나라를 통치하던 시절로부터 해방공간을 거쳐,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및 체제 대립과 6?25동란 그리고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등, 온갖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을 지나오면서 한 사람의 지식인이 이렇다할 상처 없이 살아남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한 다산한 작가로도 대표할 만하다. 1965년 중편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한 후 1966년 『매화나무의 인과』를 <신동아>에 발표했다. 1968년에는 『미술사』를 <현대문학>에 발표하였으며, 『관부연락선』을 <월간중앙>에 연재하였다. 1969년에는 『쥘 부채』를 <세대>에, 『배신의 강』 <부산일보>에 발표하였다. 1970년에 『망향』을 <새농민>에 연재하였으며, 1971년에는 『패자의 관』을 발표하고, 『화원의 사상』과 『언제나 그 은하를』을 연재하였다. 1972년에는 단편 『변명』과 중편 『예낭 풍물지』, 『목격자』 발표하였으며, 장편 『지리산』을 <세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973년 수필집 『백지의 유혹』이 간행되었으며, 1974년에 중편 『겨울밤』 『낙엽』을 발표하였다. 1976년 중편 『여사록』, 『망명의 늪』, 단편 『철학적 살인』을 발표하였다. 1978년 『계절은 끝났다』 『추풍사』를 발표함과 더불어 『바람과 구름과 비』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1979년 『황백의 문』, 1980년 『세우지 않은 비명』, 『8월의 사상』을 발표하였다. 1981년에는 『피려다 만 꽃』, 『허망의 정열』 『서울 버마재비』, 『당신의 성좌』를 발표하였다. 1983년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소설 이용구』, 『우아한 집념』, 『박사상회』를 발표하였다. 1984년 장편 『비창』을 간행하였고, 1986년 『그들의 향연』, 『무덤』, 『어느 낙일』을 발표하였다. 1987년 『소설 일본제국』, 『운명의 덫』, 『니르바나의 꽃』, 『남과여―에로스 문화사』를 간행하였다. 1989년 『소설 허균』, 『포은 정몽주』, 『유성의 부』, 『내일 없는 그날』을 간행하였고, 1990년 장편 『그를 버린 여인』을 간행하였다.
이렇듯 끊이지 않는 작품 활동을 해 오는 동안 1977년 중편 『낙엽』, 『망명의 늪』으로 한국문학작가상과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84년엔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병주는 80여 권의 중,단편을 발표한 후에도 1992년 4월3일 지병으로 타계하는 날까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작가는 제1의적으로 역사의 기록자임을 자부해야 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드라마를 탐구하고 요약하고 재현하는 역할에 있어서 역사가를 능가해야 한다. 분석자이며 동시에 기록자라야 하고, 스스로 배우이면서 연출자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 창작인으로서의 작가의 면목이다. 이러한 면목과 역할을 다하려고 할 땐 새로운 결의와 연한이 있어 마땅하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써 새로운 습작시대를 열려는 것이다.”고 작가는 말했다.
우리는 다독多讀과 다작多作으로 후배 문인들을 독려했던 작가 이병주의 문학적 열의를 생이 다한 지금에도 그가 남겨준 유산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