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은 자신이 깊이 빠져든 정신분석 세계에서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위대한 인물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프로이트였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즉시 의기투합했다. 프로이트는 융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이 창설한 국제정신분석학회 초대회장으로 융을 지목했다. 하지만 융은 서서히 서로의 학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프로이트와 다른 학설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한동안 융은 중심을 잃고 내부로 침잠했다. 아직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암흑체험이라 할 수 있는 고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무렵 융은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깊이 몰두했는데, 만약 이 시간이 없었다면 융의 심리학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융은 상상 이상의 고통과 갈등을 겪었다. 그래서 자신의 심층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융은 다양한 꿈을 꾸는데 그중에는 무시무시한 악몽도 있었다. 어두운 동굴 속에 물이 흐르고 그곳에 시체가 떠 있다거나 피가 솟구치는 꿈, 시체가 화장터에 놓여 있는데 아직 살아 있는 꿈처럼 괴기스러운 것이 많았다. 그만큼 심리적으로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는 정신분열증을 겪는 사람이 그런 상태에 빠지기 쉬웠고, 융은 자신이 혹시 그런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염려했다. 해서 그저 염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안에 그와 같은 유전적 징후가 없었는지 조사하기까지 했다. --- pp.179~190, 「카를 구스타프 융, 심층심리 여행에서 확립한 무의식의 세계」 중에서
하지만 그에게 있어 이 불운했던 시기는 ‘다음의 비약’으로 이어지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그 몇 년간 그가 앞으로 남기게 될 거의 모든 업적이 씨앗의 형태를 갖췄던 것이다.
현 대학제도를 보면서 나는 가끔 교수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대개는 대학원을 졸업한 후 대학에 취직해 조교, 강사, 준교수, 교수라는 출세의 계단을 올라가느라 늘 잡무에 치여 연구에만 집중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거미줄에 걸린 모기처럼 꼼짝달싹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는 학자도 많다. 지나치게 바쁘다는 것, 즉 시간적 여유를 갖고 통 속에서 아이디어를 숙성시킬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곧 창조력을 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현상은 아인슈타인이 살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인슈타인의 동급생 가운데 그만큼 놀라운 업적을 이뤄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을 두고 단순히 ‘아인슈타인은 역시 천재였다’라는 말로 간단히 가름해 버리는 건 다소 어폐가 있다. 사실 아인슈타인이 이룩한 성과와 업적은 대학에 취직한 다른 동기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천재의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력을 싫어하고 자유를 갈구하던 그의 성격이 베른의 특허청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했고, 그 일이 가져온 여유시간은 결과적으로 모든 재능을 연구에 쏟아 부을 수 있는 숙성기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다. --- pp.35~36, 「앨버트 아인슈타인, 20세기의 세계관을 바꾼 가장 재능 있는 인물의 불운」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집안은 음악가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유명한 음악가가 자주 찾아왔다.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같은 유명한 작곡가와 지휘자가 부담 없이 차를 마시러 오는 그런 환경이었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형인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은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 중략 …… )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네 명의 형이 있었는데 피아니스트인 파울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자살했다. 그들의 자살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형제가 모두 섬세하고 예술적 기질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 집안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인 성향이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정신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 그의 행동이 이상하게 비춰질 때도 많았고, 또한 동성인 남성에게 끌리고 여성에게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고민하던 시기도 있었다. 1914년,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상류 계급이라는 신분을 이용하면 충분히 징병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pp.148~14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고』에서 『탐구』로 비약하기 위한 에움길」 중에서
천재란 하늘로부터 받은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하늘이 준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재능이다. 이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뭔가 이유를 붙이고 싶다는 사람을 위해 하나만 덧붙이자면 천재의 시간은 천재가, 천재가 되기 위해 내면에 몰입하는 기간이며 동시에 천재의 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숙성기다.
그렇다고 모든 천재가 살아있는 동안 입신양명하는 것은 아니다. 생전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다가 죽은 후에 샛별처럼 빛난 천재도 많다. 천재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인정받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세상에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천재도 많다. 천재들은 하늘로부터 내면에 몰입할 기회를 얻고 숙성기를 거쳐 커다란 일을 이룬다. 하지만 세상은 하늘과는 다르다. 세상은 인간이 모여 있는 집단에 불과하다. 그런 세상이 천재적인 일을 천재로 인정할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하고 무시할지는 인간적인 요소일 뿐이다. 고독한 천재는 종종 세상의 무시당한다. 천재 작가가 문학상에 응모해도 보는 눈이 없는 심사위원을 만나면 세상에 알려질 기회를 잃고 만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천재의 일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이 많지 않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쉽게 남의 업적을 질투하고 자신과 비교해 부러워하거나 반대로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천재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천재임을 인정받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천재가 되는 것과 입신양명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