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이어서 봉선화는 몇 잎 남아 있지 않았다. 따서 모은 봉선화를 홍임이 편편한 돌 위에 놓고 작은 돌로 콩콩 짓찧었다. 그가 엉거주춤 홍임이 곁에 앉았다. 한 폭의 그림이었다. 혜완이 불시에 방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열린 장지문 틈새가 부녀의 다정한 모습을 가리지 못했다.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이려면 묶어줘야지, 헝겊은 있느냐?” 계집아이의 조막만 한 얼굴이 해뜩하니 쳐들렸다. 순간 혜완은 눈앞이 어질거렸다. 얇은 눈꺼풀에 긴 눈매가 남편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너무나도 빼다박은 핏줄의 내림이 섬뜩해서였다. 아침 밥상을 받은 그의 바지 대님이 짝짝이라는 걸 알았다. 대님 한 짝을 홍임에게 주고, 뭉갠 봉선화를 손톱에 감아주었는가? 한쪽은 옥색이고 한쪽은 회색이었다. 혜완은 못 본 체했다. --- p.29
약용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를 어쩐다? 아깝구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보다 그 목소리가 더 아릿했다. 네 살에 천자문을 달달 외웠고 지난해부터는 획 하나 거르지 않고 천자문 백삼십 쪽을 해서로 필사했다. 한자리에 앉아 몇 시간을 골똘히 필사하는 모습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쓰라거나 외우라거나 자세를 어찌하라거나 붓을 이렇게 들어야 한다는 조언은 하지 않았다. 그냥 멀찌감치 미뤄둔 채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반듯한 자세로 붓을 든 팔에 힘이 느껴졌다. 해서체로 된 천자문 그대로를 베껴 쓰는 일이라 제 나름의 서체를 다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견했다. 내 핏줄인가? 홍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아버지하고 올라가자.” --- p.48~49
유배지 강진에서 홀연 나타난 진솔이라는 여인이 안겨준 평온, 나른한 휴지(休止)를 그는 탐욕스럽게 껴안았다. 깊고 따스하고 청결했다. 그가 질색하는 행동거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 안온을 줄줄이 꿰어 차면 열 가지도 넘을 것이다. 조가비처럼 다문 입술이 듬직했다. 갉작거리지도 목소리로 말을 씹지도 않았다. 굼뜨거나 촐싹대지도, 치맛바람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센 입김을 풍기지 않았다. 일곱 명 제자들의 점심 한 끼니? 말은 그랬다. 어젠 온종일 깻잎을 씻어 말린 후 무명실로 묶어 단을 만들었다. 된장에 박고 졸인 간장에 켜켜이 재는 걸 보았다. 산등성이를 훑으며 쑥부쟁이나 민들레, 고사리에 버섯까지 몇 소쿠리나 담아 날랐다. 뜯어 온 산나물을 마당에 부리거나 그의 눈이 지나가는 곳에서 가리지 않았다. 찌고 말리고 단속하는 과정을 좁은 정지에서 해치우면서도 그릇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참 여문 사람이구나 싶었다. --- p.311~312
뭔가 뜨거운 것이 입안에서 깨물렸다. 다시 눈을 감는다고 끊어진 꿈이 이어질까. 흘러내린 눈물이 콧등을 지나 입술을 적셨다. 남당사라, 진솔. 정녕 그대 글씨가 맞는데, 어찌 이리 절절하단 말인가? 입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그의 새벽을 허물었다. (……) 한 장의 백지처럼 가벼운 육신, 나른한 평온으로 환치되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 결박, 그랬다. 평생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여미고 있던 사슬이었다. 체면이라는 사슬, 살 속으로 파고든 그것은 뼈를 녹이고 살을 파먹고 갈기갈기 찢어 그를 부스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