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유물을 통해 보면, 입사의 바탕 재료는 주로 철과 청동이었으며 입사 재료는 무른 성질의 금속인 금, 은, 동이 사용되었다. 금, 은, 동은 자체의 아름다운 색상과 쉽게 다루어지는 성질을 지녀 금속 공예에서 주 재료로도 쓰이지만 입사 기법에서는 명문을 살리거나 무늬의 구분과 강조, 외형선의 구분 등에 선택적으로 사용되면서 기물 전체의 아름다움을 살려 주는 장식 효과의 역할을 하였다. 삼국 시대 이후에는 주로 금보다 은을 입사하는 방법을 애호하였으며 일부 동과 은을 혼합하여 색채 효과를 살리는 다양한 방식을 채택해 나갔다. -‘1장 입사를 말하다’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랜 입사 유물로는 백제 4세기 후반 쯤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충남 천안시 화성리 출토의 철제 은입사 환두대도(고리자루칼)이다. 아직까지 삼국 시대 입사 공예품으로 알려진 것들은 주로 백제, 가야, 신라 고분 출토의 권위를 상징하는 환두대도로 약 20여 점 정도가 확인된다. 이들은 주로 철 바탕에 선으로 입사된 무늬를 보여 주며 입사 재료로 금, 은, 동선이 쓰였으나 상당수 유물이 은선으로 장식되어 있다. 신라에서도 환두대도의 고리 또는 검신에 입사되었던 예를 확인할 수 있으나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 그보다는 가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철제를 잘 다루었던 가야 문화에서 은입사 역시 발달된 것을 알 수 있다. 경북 고령군 지산동에 위치한 가야 시대 고분에서 은입사 당초문을 넣은 철도鐵刀가 발견되었으며 전북 남원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 은입사 환두대도에는 고리 부분을 금과 은선으로 입사하였는데, 육각형으로 분할하여 두 줄의 은선으로 새겨 넣고 육각형 안에 금선으로 꽃 모양을 새겨 넣었다. 유일하게 4세기경에 만들어져 일본 왕에게 하사된 백제 칠지도 역시 백제의 발전된 제철 기술과 입사 기술의 수준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처럼 칠지도나 환두대도에서 보이는 철제에 사용된 입사 기술은 철의 표면을 또 다른 철로 만든 도구인 정을 이용하여 파내는 작업과 파인 홈에 은실을 박아 넣은 후 연마하는 작업이 병행된다. 그렇게 홈을 파내기 위해서는 바탕의 철보다 강한 정의 제작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철제품의 제작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1장 입사를 말하다’에서
끼움 입사의 기본 작업은 기물의 바탕에 그려진 무늬의 선을 폭이 얇게 정으로 파내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을 조각雕刻이라 하는데 서양의 ‘engraving(새김)’과 유사하다. 동양과 서양의 조각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다양한 무늬를 자유자재로 조각하는 것은 난이도가 높은 기술로 많은 노력과 시간을 거쳐야 이룰 수 있다. 무늬의 조각 후에는 파인 부분을 일정하게 다지고 넓혀서 색이 다르고 성질이 무른 금속을 알맞게 가공하여 홈 안에 박아 넣는다. 일정한 넓이로 조각된 선의 밑면을 사다리꼴로 넓혀서 박힌 금속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홈의 넓이, 무늬의 종류에 따라 여러 종류의 옆면 넓히는 정들이 필요하고 상황에 따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해야 한다. -‘2장 입사를 하다’에서
쪼음 입사의 기본 작업은 약간의 폭을 지닌 끝이 얇고 날카로운 일자형一字形의 쪼음 정으로 기물의 표면 전체 혹은 무늬를 넣을 일부분을 ‘米(쌀 미)’자 방향으로 촘촘히 겹쳐서 쪼아 내는 것이다. 바탕 금속을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으로 4번 겹쳐서 쪼아 내어 매끈했던 표면에 거스러미를 만들어 내는 작업으로, 바탕 금속에 따라 3번 혹은 4번 겹쳐서 쪼아 낸다. 거스러미의 간격은 약 0.2~0.25mm 정도로 촘촘하고 균일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타격하는 망치와 정의 숙달된 사용이 매우 중요하다. 끼움 입사는 무늬의 선을 파내어 입사를 해야 하므로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표현에 한계가 있는데 반해, 쪼음 입사는 바탕 금속 전체나 무늬가 들어갈 부분을 쪼아 내어 그 위에 실과 같은 가는 선을 이용하여 선이나 면에 구애받지 않고 섬세하고 회화적인 무늬 표현까지 가능하다. -‘2장 입사를 하다’에서
고려 시대에는 나팔형의 높은 굽 위에 넓게 전이 달린 고배 모양의 향로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이런 형태의 향로를 특히 향완香?이라 불렀다. 향로의 표면에는 무늬를 파내고 은사를 얇게 꼬아 무늬에 넣는 은입사 기법을 사용하여 범자무늬, 넝쿨무늬, 용무늬, 봉황무늬를 시문하였다. 간혹 물가의 풍경을 묘사한 회화적인 무늬가 장식되기도 한다. 그리고 향을 담기 위해 제작된 향합香盒에도 화려한 은입사가 시문된 작품이 남아 있다..-‘3장 입사를 누리다’에서
청동제의 입사 공예품에 비해 제작이 편하고 값이 싼 철제 입사 공예품은 조선 후기부터는 그 사용 범위가 넓어지고 품목도 다양화되었다. 선비들의 사랑방 도구인 담배함, 연적, 필통, 문진, 화로 등의 다양한 도구들과 당시의 호사스러움을 반영하듯 촛대, 자물쇠, 가위 같은 일상생활 도구에까지 은입사가 널리 활용되었다. 쪼음 입사 기법도 더욱 세밀해져 화로 등에는 회화적인 요소의 무늬를 시문하기도 하고 부귀, 장수, 복을 비는 도교적 성격의 십장생, 신선, 수복문壽福文 등이 널리 채택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길상무늬에서 나아가 민화풍의 도안이 등장하여 질병과 액운 등을 쫓아내는 부적 같은 역할을 하는 벽사무늬가 유행하였다. 등용과 출세 기원, 아들을 갈망하는 다남多男 등을 무늬와 문자로 도안하여 생활 주변의 모든 공예품에 시문하여 사용하였다. 용이나 봉황무늬는 민화풍의 순박함과 간결함이 두드러져, 보다 화려했던 고려의 무늬와 그 차이를 보인다. 또한 실제의 동물들을 소재로 한 무늬들은 해학적 표현이 두드러져 친근감을 주며 장수, 다복, 다남, 부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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