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그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처럼, 느낄 수 있지만 무형지물이거나 아니면 그물 그 자체가 진리일 때도 많습니다. 아무리 그물이 성기더라도, 그 올이 굵고 튼튼할 때 진리가 그물을 타고 올라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윤리와 역사로 날줄과 씨줄을 삼는 튼튼한 그물을 지으면 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삶을 진리로 안내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음모론’에 불과합니다. 촘촘한 그물망에 대한 턱없는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맹신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항상 궁극적인 진리와 가까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바뀌면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도 따라서 바뀝니다. 생각을 넘어서는 힘, 그게 바로 진실입니다. 그래서 예술의 진실은 묘사에 있습니다. 구조주의가 끝내 밝히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묘사의 힘, 예술의 위력인 것입니다.--- 「관계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 구조주의」
저 역시 연애를 달콤한 것만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힘들 때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헌신보다는 욕망이 늘 앞섰던 것 같습니다. 타자에의 몰입에 앞서 자기에의 탐닉이 늘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젊어서 참여했던(자의반 타의반) 모든 연애사업이 악전고투 일색이었다고 기억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안타까운 오해, 못난 이기심, 분별없는 변덕, 속악스런 타산 같은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죄 많은 내 청춘’ 시리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연전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횡행한 적이 있습니다. 큰 문제에는 시원하게(?) 합의해놓고 세부적인 타협에서 한계(본색)를 드러내 결국 서로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며 저는 젊은 날의 제 연애 사업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이 사용된 맥락과 관계없이 제게는 그 말이 저의 ‘죄 많은 청춘’을 질타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랬습니다. 디테일에 가서는 언제나 악마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비교를 일삼았고 공연한 트집거리에 휘둘렸습니다. 오직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젊어서의 사랑에는 반드시 그 ‘디테일의 악마’와 대적하기 위한 ‘싸움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몰랐습니다. 자기를 일망타진하는 ‘싸움의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자명한 사실도 모르고 연애를 그저 싸움판으로 몰고 갔습니다. 저의 연애는 천사와 악마가 하루씩 배역을 나누어서 공연하는 블랙코미디와 진배없었습니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를 보면 젊은 날의 제 연애를 연상시키는 ‘최악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