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 다섯 살 때 [삶]이라는 장편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몇 달에 걸쳐 5백 장을 탈고한 다음 꼼꼼히 다시 읽어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세계적인 명작이 될 것 같은 기대에 스스로 감격했는데, 글 장난, 말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원고지를 북북 찢은 다음 불태워 버렸다. 그 후에도 시나 수필 등을 썼다가 많이도 찢어 없앴다.
나이가 들면서, 세파에 시달리면서, 어느 정도 인생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 통일 운동을 했다는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전대협 학생들이 놓고 간 소설이나 시를 읽을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어찌 그리도 역겨웠는지 모른다. 내가 읽은 작품 대부분은 '먹물'들이 갈겨 쓴 장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민초들의 고통과 애환에 울고 웃는 문학이 아니라면, 고달픈 인간의 삶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그려내는 문학이 아니라면 값어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인간성의 순수함을 드높이고 인간 사랑의 바탕 위에서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문학을 해 보고 싶었다.
통일 운동을 하듯이 작품을 썼지만 문장이 거칠고 덜 다듬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내용만은 뚜렷할 것이라 생각한다.
--- 작가의 말
늦은 밤이나 새벽에 거리를 나서 보면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사람에서부터 대학생 같은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밤을 새워 가며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저렇게 퍼 마실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부모가 용돈을 얼마나 주기에 비싼 음식점에 앉아 희희덕거릴 수 있는지, 술에 취한 남녀가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에서 부둥켜안은 채 뒹구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심할 때가 많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물고 유유히 지나간다. 그것이 한두 사람이라야 나무라거나 말릴 텐데, 숫자가 많다 보니 타이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 어린 사람들의 건방진 행동을 오히려 어른들이 외면하면서 못 본 체 피해 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한마디로 어른의 권위가 무너진 사회요, 도덕이나 염치가 없어진 사회인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나는 평소 사회란 거대한 톱니바퀴와 같아서 좋은 사람이 많을 때는 나쁜 사람도 톱니바퀴에 섞여 돌아가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되기 쉽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다수의 나쁜 사람에 섞인 소수의 좋은 사람도 나쁜 톱니바퀴 속에 매몰된다고 생각해 왔다. 대통령들이 수천 억을 부정 축재하고도 사면을 받고 활개치는 세상, 그들을 사면할 수밖에 없는 오십 보 백 보의 대통령,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부정이 뉴스 첫머리에 올라오는 세상, 그러다 보니 작은 부정은 오히려 동정을 받는 세상, 법이 있어도 지킬 줄 모르는 세상, 정직하게 법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로 취급받는 세상,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가치인지 알 수가 없는 세상, 성공과 부자라는 결과만 부러워할 줄 알았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무시하는 세상, 부정과 부패라는 거대한 눈덩이가 청와대에서 굴러 밑으로 내려올수록 더욱 커져 끝내는 파멸이라는 바다에 빠지는 광경을 그려 본다. 그것은 한 사회의 끝장인 것이다.
신자를 속이는 목사가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고, 땀 흘려 번 신도들의 시주를 놓고 다투는 스님들이 목탁을 치고, 민족의 얼이 없는 신부들은 바티칸만을 쳐다본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 인간이 법의를 입고 정의로운 재판을 한다며 고고한 체한다. 약자의 편에 서야 할 변호사가 약자를 울리고, 범죄자를 다스린다는 검찰 총장이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면, 돈 없다고 병자의 치료를 거절하는 의사, 법을 만드는 국회 의원이 되기 위해 법을 어기는 정치인들, 국가에 들어가야 할 세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가로채는 세리들, 싹이 나지 않는 종자를 팔아 돈을 버는 업자와 결탁하여 돈을 챙기는 농협 간부들, 돈이 없으면 진급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별을 다는 세상,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허무를 심어 줬다. 정직이나 성실이 손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니 세상을 뒤집어엎을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 살 수도 없으니 맨정신으로는 못 사는 것이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공기가 탁해 숨을 쉬려면 술에 취해 건들거려야 살아남는다. 도둑질을, 강도 짓을 해서라도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그래서 술이 잘 팔리는 사회가 된 것이다. 사회가 술을 권하고, 사회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린다. 끝장이 오려면 빨리 와야 한다. 착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끝장을 내 줘야 한다. 그럼 누가 할 것인가? 죄악의 사회를 바라보며 홀로 외치는 사람들이 힘을 합해 부정과 부패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후손들이 당할 불행을 우리가 겪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 끝장을 내야 한다. 정의의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되자. 시간이 없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책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