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게임에 있다
일단 사랑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의 사랑이 다른 그 누구의 사랑보다 아름답고, ‘지금’의 사랑이 예전 그 어떤 사랑보다 소중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 심지어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단치 않게 여길 때, 충동하게 된다. 왜 내 사랑이 비교급으로 아름다운지, 왜 내 사랑이 최상급으로 소중한지에 대해,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고, 결국 재청 받고 싶어진다. 혼자 자족하는 사랑이 아닌, 모두가 알아주는 내 사랑의 타당성 혹은 정당성의 기제. 주관의 믿음은 마르고 무르기에 그것을 지탱해 줄 살지고 단단한 척추, 객관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정적 상황에서 성급한 판단으로 죽어버린 아바타를 보며 후회하고, 아이템에 눈먼 파티원의 배신에 상처 받으면서도 다시 파티를 찾고, 수십 번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면서 결국 구출한 공주의 미소에 만성피로증후군을 잊는, 게임과 사랑에 빠진 게이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게임을 ‘이해하지 못할 때’, 게임 플레이를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단치 않게 여길 때’, 나는 충동하게 된다. 왜 내 사랑이 비교급으로 아름다운지, 왜 내 사랑이 최상급으로 소중한지에 대해,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고, 결국 재청 받고 싶어진다.
게임과 사랑에 빠질수록, 게임이 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에 대해 알려고 할수록, 정작 게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아이러니를 만나게 된다.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 나보다 더 지독한, 게임을 향한 세상의 구애에 대해 나는 알고 있다. 40여 년의 게임사와 20여 년의 게임연구사를 통틀어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만들어내는 게임에 대한 탁월한 연서戀書들을 볼 때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연적戀敵을 만난 듯 질투하게 된다.
허면, 나는 어떠한가. 내가 지금까지 써온 연서의 수준은 어떠한가.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2000, CNC미디어)에서 게임이 가진 힘을 예찬했고,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2005, 루비박스)에서 게임이 들려주는 말에 집중했으니, 이제 나는 어떤 사연으로 게임에 대한 내 사랑을 증명할 것인가. 더 이상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만으로는 연적을 물리치기 위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잘 아는가’에 대해 들려줘야 한다. 게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이제 선악과의 향기를 품은 뱀의 길을 따라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첫째, 게임과 놀이와의 관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의 논쟁구도나 호모 루덴스와 호로 파베르의 이분법적 논의는 유효성의 한계에 부딪힌 만큼, 놀이와 게임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발본적 변화 과정이 담겨 있다. 이 문제를 2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둘째, 게이머의 위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위상학적 공간과 살아 있는 육체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접근을 통해 7장에서 게이머의 위상을 해명할 것이다.
셋째, 게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한다. 상호작용성이라는 전가지보傳家之寶를 넘어, 게임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방식과 그 현상이 표상되는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성의 구체적 작동양식과 존재 조건에 대해 3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넷째, 게임의 의미 전달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한다. 게임을 하나의 의미 생산 구조로 간주할 때, 의미 생산의 구체적인 층위들과 각 층위들의 상호관계에 대해 행위의 축과 그 연쇄의 축 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4장과 5장에서 다룰 것이며, 이를 토대로 6장에서 기존 문학적 해석과 다른 입장으로 게임의 내러티브 요소를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에 대한 연구가 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게임은 허물을 벗고 사라진 뱀처럼 행방이 묘연하다. 우리는 하릴없이 흉물스러운 뱀의 허물을 뒤적이며 이미 사라진 본질에 대한 추상적 논의, 플레이 없는 플레이 경험 연구, 게임 없는 게임문화 연구로 종적을 감춘 게임을 추억할 수밖에 없다. 포수가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학문의 잣대로 게임의 본질을 겨냥하지만, 매양 얻는 것은 허물만 남은 상像한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본질로서의 게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문제가 복잡할수록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뱀을 만나려면 뱀굴에 들어가야 한다. 직접 봤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한다 해도 그들의 증언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소문 무성한 독니가 두려워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서, 뱀굴 밖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실체라고 믿어서도 안 된다. 똬리를 틀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는 게임과 마주 서야 한다. 두 눈으로 게임을 봐야 한다. 손끝으로 게임을 느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움직이는 게임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게임에 접속한다. 그리고 게임을 경험한다. 그뿐이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