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첫 담요를 짜는 할머니 거미가 있다. 소피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 거미다. ……소피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를 싫어하고 징그러워하는데도 자신의 재능을 나눠주려 마음을 쓰고 애를 쓴다. 그래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 거미가 되어서도 소피는 달빛으로 아기의 담요를 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 나날의 생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혹은 내 가족을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서 거미줄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짠 거미줄이 누군가의 손길에 난폭하게 찢겨 나가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도 또다시 만들어야 하는 삶의 거미줄 말이다. 허나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거미줄에 목숨을 건다면 그 얼마나 보잘것없는 생이겠는가. 그렇다면 내 생애 최고의 거미줄 작품을 누구에게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소피는 처음부터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머리가 하얗게 셀 때쯤이나 제대로 나눌 수 있으려나.
-<현명함은 최고의 선물> 중에서-
다만 노약자가 자신의 자리로 지정된 곳을 비워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고, 옆의 누군가도 노약자를 위해 자리 양보를 요청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벌금을 부과한다는 사회적인 약속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새로웠다. 다른 한편 그 나라에서는 누군가가 요구를 해야만, 그것도 우리 돈으로 7만원에 가까운 벌금을 명시해야만 자리를 양보하는가 싶으니 그 또한 유쾌하지는 않았다.……누구의 요구나 벌금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회의 약자들과 소통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경로 유감> 중에서
노인을 배려하는 문화는 다른 세대의 편리함과 이익에서 일정 부분을 덜어내 노인 세대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보행로의 모서리턱을 없애고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니기 쉽게 만든다고 해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해지지 않는 것처럼, 약자가 편안한 세상은 약자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편안한 세상이며, 그들이 나중에 약자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서
노인복지관에 근무할 때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죽음 준비’와 관련된 강의를 마련하고 강사를 모신 적이 있는데, 어르신들의 반응이 냉담해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다 살았지.” 아무리 자주 말씀하셔도 어르신들에게 죽음은 피하고 싶고 저만치 돌아가고 싶은 금기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 점은 젊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알폰스 데켄이 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통해 새로 알게 된 것이 ‘리빙 윌’이라는 개념이다. 리빙 윌이란 건강할 때 존엄한 죽음을 원한다는 의사 표시를 해두는 것이다. ……죽음의 철학은 곧 삶의 철학이며, 죽음 준비교육은 바로 지금 잘 살기 위한 삶의 교육과 다르지 않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 법, 어느 누구도 결코 죽음에 무관심할 수 없다.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새로운 곳으로 다시 떠나는 여행길에 어찌 준비 없이 나설 수 있겠는가.
-<죽음을 선물로 주고 갈 수 있다면> 중에서
영화 《집으로》의 상우 엄마도, 또 《고양이를 부탁해》의 손녀 지영도, 천형 같은 가난으로 인해 그리 녹록치 않은 삶을 살 것임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이렇게 가난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을 옭매고, 다시 그들의 자식과 손주들의 삶마저 옭아매며 흘러간다.……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가난이지만 마지막 남은 삶까지 가난에 저당 잡힌 할머니 할아버지의 현실은 더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정말 이 가난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일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데> 중에서
영화 《아이리스》는 치매가 발병한 노년의 삶과 두 사람이 함께 한 젊은 시절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 준다. 아이리스의 기억 또한 그렇게 현재와 과거가 서로 오가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이리스처럼 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긴 마찬가지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이, 노년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서로의 기억을 나누며 함께 손을 잡는 일. 그 또한 사랑 없이는 어려운 일이리라. 그래서 지금도 많은 노인들이, 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헌신과 사랑으로 치매 걸린 배우자를 수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치매인가 봐> 중에서
몸살로 앓아 누운 할머니에게 약을 사다 먹이고 직접 닭을 잡아 상을 차려 내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맙고 미안하다며 울고 만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나는 왜 울었을까. 비록 마음을 나누고 몸을 나누지만, 남은 날이 많지 않은 노년의 사랑은 너무 짧아 안타깝고 애틋해 슬프다. 할아버지는 밤이고 낮이고 잠자리를 갖고 나면 꼭 달력에 표시를 한다. 떨리는 손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하면서 할아버지는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의 생에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을 남겨 두고 싶었을까.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 스스로에게 내보이는 존재증명은 아니었을까.
-<애로愛老 영화 찍으실래요?> 중에서
지금은 좀 다르게 말씀들을 하겠지만 예전에는 “대통령도, 정치지도자들도 본인이 다들 노인인데 왜 노인복지는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그런데 대답은 어쩌면 간단한지도 모른다. 노년기의 네 가지 고통 중 어느 한 가지에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 노인을 알겠는가. 그들은 모두 경제적 문제|빈곤|, 건강 문제|병약|, 역할 상실|무위|, 고독과 소외의 문제, 이 네 가지 어려움에서 벗어나 있었다.
-<노년기의 네 가지 고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늙어 간다는 것이 일종의 실패로 여겨지는 곳에서, 자신을 제대로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아 이상의 존재이며, 통찰력을 가진 영혼의 존재라는 믿음이 없다면 늙음과 죽음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두 가지다. 늙음의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 우리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며 내부에 있는 영적인 힘을 믿는다면, 람다스의 말처럼 믿음과 사랑은 늙음보다도 죽음보다도 강하다고 확신할 수 있으리라. 결국 순간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삶에는 자연스럽게 나이듦도 포함된다.
-<나이 드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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