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킹 24호」
백화점 쇼윈도에서 마네킹 24호로 일을 하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 어린 시절 마네킹 공장에서 속이 텅 빈 마네킹 안을 물로 채운 경험이 있는 그녀는 자신이 마네킹이 된 지금,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을 마시면서 자신 안에 채워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우려 한다. 그녀를 모델로 데뷔시켜주겠다며 은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디자이너 윤 실장은 그녀의 그런 습관이 애정 결핍이라고 단정 짓고 자신이 채워주겠다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다른 마네킹 모델 기연과의 관계로 여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준다.
「명왕성이 자일리톨에게」
학교에 가지 않고 집 안에서 혼자 가위질을 하며 세상의 뒷면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의 이야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유 없는 폭력을 당하던 화자는 주변이 모두 빙글빙글 도는 환상에 사로잡히며 학교에 가기를 거부하고, 집 안에서 가위질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사물의 뒷면이 앞면처럼 보이면서 빙글빙글 도는 환상에서 벗어난다. 회사에서 일찍 짐을 싸야 했던 아버지와 자신의 처지를 교회를 통해 위안받는 어머니 사이에서 화자는 행성에서 퇴출된 명왕성을 생각하며 정해진 개수와 금세 빠져버리는 단물처럼 소진될 불안을 가지고 있는 자일리톨을 위안 삼아 자신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굿 초이스」
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선택을 들여다보게 되는 발관리사의 이야기. 공장에서 부품 조립하는 일을 하던 여자는 우연히 신문 기사를 보고 발관리사의 길을 선택한다. 타일공이었던 아버지가 수평 감각을 잃고 공사 현장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이유가 발이 못생겨서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아버지의 발을 꼭 빼닮은 자신의 발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예쁜 발을 가진 사람들을 동경하며 그 예쁜 발 때문에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늘 휘둘리는 그녀는 늘 자신의 선택이 굿 초이스인가를 걱정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끄러운 경사면에 대한 두려움」
암에 걸린 아내의 머리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면서, 경사면을 두려워하는 토끼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이야기. 암에 걸린 아내는 머리가 점점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그만큼 고통도 커져간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경사면을 무서워하는 토끼의 모습을 본 아내는 남편에게 토끼를 사달라고 하고, 마치 자신을 대하듯 토끼를 키우다가 결국 놓아준다.
「역주행」
역주행으로 교통사고를 내고 죽은 아버지와 그로인해 극심한 조울증을 겪고 있는 엄마, 그리고 교통 상황을 모니터링하듯 그것을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 재래시장에서 생선 가게를 하던 화자의 부모님은 재개발 바람과 함께 들어선 대형 마트로 삶의 위기를 맞고, 그 상황을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수산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역주행으로 사고를 내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엄마는 조울증으로 많은 양의 칼국수를 꾸역꾸역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고, 교통 상황 모니터링 일을 하는 화자는 꽉 막혀 길이 보이지 않는 길을 바라보며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는 진화하거나 소멸한다」
방 안에 감금된 한 남자아이의 이야기. 폭력적인 남자와 힘이 없는 엄마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어느 날 집 안에 불을 질러, 엄마를 잃고 남자에 의해 방에 갇히게 된다. 남자를 이길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방 안의 개미를 태워 죽여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그 아이에게 옆집 여자아이가 나타나고 둘은 자신들만의 은밀한 만남을 갖는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가는 남자아이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여자아이는 그가 디지몬처럼 진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만남은 남자에 의해 곧 발각되고, 여자아이마저 함께 갇히고 만다. 남자아이는 자신들의 진화를 위해 숨겨두었던 석유를 뿌리고 돋보기로 불을 붙인다.
「봄날」
누구보다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구두수선공이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점점 황폐해져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 신발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보는 사내는 구두수선공인 자신의 직업에 뿌듯함을 느끼며 아내에 대한 사랑도 새삼 깨닫는 등 행복이 가득한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여자의 구두 굽을 갈던 중 연장의 날카로운 날에 손을 다치고, 그 후 한동안 구두를 손볼 수 없게 된 사내의 생활은 점점 꼬여만 간다.
「서울, 펭귄, 비둘기」
공원 안내소를 지키는 한 남자의 이야기. 직장을 잃고 점점 정신마저 잃어가다 급기야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게 된 아내를 둔 공원 안내소를 지키는 남자는 어느 날 아내가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 안내소를 지키며 아내를 기다린다. 공원을 배회하는 정신이상의 한 여인에게서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던 그는 그 여인이 사라진 날,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좁쌀을 비둘기들에게 던져준다.
「섬에는 비상구가 없다」
지하철 신문 가판대 일을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한 여배우의 투신자살 기사가 난 날, 사람들은 그 기사를 보기 위해 지하철 신문 가판대로 모인다. 그 가판대를 지키고 있는 남자는 그 자리를 대신할 아르바이트생을 기다리며 그 답답한 지하를 벗어나 지상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할 미래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아르바이트생은 오지 않고 여자 친구와의 연락은 여의치가 않으며, 어떤 사람이 선로에 뛰어드는 등 그곳에서의 밤은 끔찍하게 이어진다.
「움」
한 소녀의 눈으로 본 어른들의 이야기. 중고 가구점에서 가구 닦는 일을 하는 여자아이는 못생기고 볼품없는 중고 가구를 닮은 이모와 중고 가구점의 주인인 이모의 남편, 그리고 그 가구점에서 일을 하는 호태 오빠와 함께 산다. 엄마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는 자신이 이모라 부르는 사람이 진짜 이모인지 확신할 수 없고, 이모와 이모의 남편은 사이가 좋지 않으며, 이모와 호태 오빠는 은밀한 관계를 맺는 사이이다. 이처럼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인 이들의 관계는 중고 가구처럼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거덕거리고, 그 안에서 아이는 성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