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방의 불빛은 골목의 어둠을 밝히지도 못하고 어둠 속으로 함께 침몰하지도 못한 채 차가운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창백한 빛을 내보내고 있는 사각의 방, 우리는 저 안에서 우리만의 갈래길을 꿈꾸었지만 지금 저 방은 잠들지 못하고 있다. 멀고 어두운 겨울밤을 불빛 하나로 버텨야 하는 그와 나의 방은 삭정이에 걸린 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펼쳤던 보(褓) 또한 두 사람 사이에 새롭게 탄생하는 한 생명의 낯선 운명을 감싸 안기에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닐까.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눈물 때문에 내 눈에 어리는 달은 자꾸만 기울고 있는데.
---「가위바위보」중에서
나는 게오르게 그로스의 「담배-술집」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른 사내는 ‘나의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주홍, 노랑, 갈색의 강렬한 술집 차양을 담배 연기가 휘감아 도는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사내는 오늘도 거리를 다녀왔다. 거리에는 더위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더위의 커다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그 거대한 괴물의 식도와 위장을 거치면서 당질과 아미노산 따위의 원소로 산산이 분해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더위는 호시탐탐 사내를 삼킬 기회를 엿보았고, 사내는 자신의 즙과 향을 탐하는 더위의 널름거림 앞에서 불현듯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누군가가 저 맞은편 의자에 앉아준다면 사내는 가슴을 육중하게 압박하는 것의 한쪽 끄트머리를 잡아 쥐고, 도대체 나는 누구인 것이냐고 소리쳐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리에서 사내 앞에 있는 것은 화상 입은 바람뿐이었다.
---「빈 의자」중에서
그러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상처는 치유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생채기가 나버린 것들 자체가 이미 내 삶의 일부였으므로 그것을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지고 극복하고 싶다고 해서 극복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단지 새롭게 생겨난 더 험한 상처, 더 강한 충격, 또는 더 절박한 희망과 욕망에 의해 예전의 상처들이 차지하던 부피와 중량이 훌쩍 가볍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 생긴 상처들을 들여다보면서 살 수 있던 삶이 평탄한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인생에 더 큰 상처, 더 절박한 다른 상황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 병원 앞 식당에서 청국장백반을 주문해 허기진 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식사 이후 생수 외에는 아무것도 못 먹었던 터라 밥공기를 깨끗이 비웠는데도 배가 고팠다. 밥 한 공기를 더 주문하면서 문득 선화의 말투가 떠올랐다. 배가 안 고픈 거 같은데, 아니 안 고픈데, 그런데 나는 배가 고프다니까…… 새 밥을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으며 나는 대답해주었다. 그래, 선화야, 나도 그랬어. 내 인생이 괜찮은 거 같은데, 아니 괜찮은데, 그런데 나는 안 괜찮았다니까……
---「작고 마른 인생」중에서
안전하고, 반듯하고, 항상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 있고, 원칙대로 사는 것만이 인생이라고 세뇌시킨 어머니를 완전하게 배반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모기향에서 피어오르던 마약 같던 연기를 최대한 들이마시고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기가 되었다가 그 뜨거운 불빛 위로 온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등변 삼각형도 있고 직각 삼각형도 있고 세 변의 길이가 각각 다른 여러 형태의 부등변 삼각형들도 있을 수 있는데, 세 개의 삼각형으로 이뤄진 삼각형이나 열두 개의 삼각형으로 이뤄진 평행 사변형도 있을 수 있고 삼각형이 여러 개 이어진 입체 도형도 있을 수 있는데, 오로지 세 변과 세 각이 똑같은 정삼각형만이 인생이고 나머지는 다 죄악이라고 강박관념을 심어준 어머니를 내 안에서 온전하게 버릴 수만 있다면 러브리스 섹스인들 못하겠는가. 러브리스 모성도 있는데 그까짓 러브리스 섹스가 무슨 대수겠는가.
---「어머니를 떠나기에 좋은 나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