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흔히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되어 왔다. 허황된 공상과 엄밀한 과학이 결합해서 소설이 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특이한 장르일 수밖에 없다.
이런 SF의 효시로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년)이 꼽힌다. 전기를 이용해서 시체들의 결합체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내는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공상과 과학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고딕소설로 괴기적인 분위기 역시 갖추고 있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쓰여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와는 다르다. 따라서 <드라큐라>를 SF의 범주에 넣지는 않는다.
공상과학소설은 프랑스의 쥘 베른과 영국의 H.G. 웰즈에 이르러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웰즈의 <화성침공>, <타임머신>은 SF의 고전으로 현재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베른은 공상과학소설에서 모험을 중시했고 웰즈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도구로 SF를 사용했다.
SF가 문학의 한 장르로 확실한 자리를 굳힌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휴고 건스백은 1926년 <어메이징 스토리>를 창간했고, 1930년 존 캠벨의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을 통해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이라는 이른바 SF의 3대 거장이 등장한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세계2차대전 이후에 SF는 인기가 크게 높아지고 문학의 한 장르로 확실하게 받아들여졌다. 1949년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작품과 <나니아 이야기>를 쓴 C.S. 루이스의 처럼 문학성 높은 작가들이 SF를 쓰면서 장르 자체가 심화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커트 보니것은 무명 SF 소설가로 출발했지만 미국 문단의 주류 작가로 성장했다.
이처럼 서구 사회에서는 SF는 문학의 한 당당한 장르로서 대접받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SF라고 하면 대중 소설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중 소설 중에서도 무협 소설이나 추리 소설처럼 주목받아본 적도 없는 아주 열악한 위치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SF는 매니아들만이 즐기는 소수의 별난 사람들이나 찾는 소설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더구나 SF 영화의 대표주자인 <스타워즈>와 같은 영화마저 국내에서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면서 국내에서는 SF란 아예 성공할 수 없는, 말하자면 대중적이지도 않은 분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터미네이터>는 대성공을 거둔 시리즈였고 <매트릭스> 역시 공전의 히트를 거두고 2편도 대박을 예상하고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는 황당한 우주 공간을 누비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우주를 무대로 하고 있다. 혜성이 지구로 떨어지는 것을 다룬 <아마겟돈>이나 <제5원소>와 같은 영화도 SF 영화이며 성공한 영화였다. 이런 예는 끝없이 들 수 있다. <공각기동대>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와 같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SF의 성공의 비결에는 스토리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공상>이었던 것이다. SF에서는 우주를 배경으로 악당들과 싸워 나가는 거대 스케일의 소설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부른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실은 SF를 얕잡아 보는 말이었다. 미국에서는 그렇고 그런 홈 드라마를 <소프 오페라>라고 부른다. 그런 드라마에 비누(soap) 회사들이 스폰서를 선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서부극은 <호스(horse) 오페라>라고 부른다.
우주 대활극을 의미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시조로는 에드가 라이스 버로즈가 거론된다. 바로 <타잔> 시리즈를 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화성으로 날아가 화성의 위기를 구해내는 <화성의 공주>(1910), 지구 내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지저세계 펠루시다>와 같은 SF 대작을 썼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형적인 형태를 만든 작가는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다. <은하 패트롤>을 통해 우주를 무대로 하는 거대한 세계를 꾸며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런 식으로 장르를 한정짓는다는 것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예 과학적인 배경과는 별 연관없이도 만들어지는 <은하영웅전설>이나 <스타워즈> 시리즈도 있는가하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와 같이 정통 SF 대가의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SF는 그야말로 성공할 수 없는 마의 장르라고 여겨져왔다. 1991년 이성수의 <아틀란티스 광시곡>이 나와 90년대에 추리 소설, 무협 소설의 붐과 함께 SF 소설에도 봄이 오는가 싶었다. 이성수의 소설은 1989년 천리안에 연재되었던 소설로 사이버 문학이라는 논의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된 소설이기도 했다.
1992년 복거일의 SF <파란 달아래>가 역시 천리안에 연재된 후 출간되었다. 그러나 1993년 이우혁의 <퇴마록>이 등장하면서 SF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사라졌다. 공포와 괴기, 심령, 환타지가 적절하게 녹아든 <퇴마록>에서 대중 문학의 지평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영도의 환타지 소설 <드래곤라자>가 등장하자 대중 문학의 축은 급속도로 환타지 소설로 경도되었다.
그 안에 간간히 SF가 명목 유지용처럼 등장했다. 주로 단편집 위주로 <창작기계>, <사이버펑크> 등이 나왔었지만 9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자 외국 번역물조차 거의 발간되지 않게 되었다. 특히 1999년 야심만만하게 내놓았던 SF대하소설 <피라미드>가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SF에 대한 관심은 더욱 엷어졌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결코 국내에 SF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거나 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과 같은 경우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도 베스트셀러였다.
문제는 원작이 갖고 있는 힘이다. 소설 자체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따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007이 임무 수행 중에 죽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007 소설과 같은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이유는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음모는 누가 꾸민 것이고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점에서 독자들을 흡입하지 못한다면 누가 뻔한 줄거리에 기초한 소설을 지루함을 참고 읽어나가겠는가?
<미래경찰 피그로이드>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기존의 다른 소설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우주를 무대로 활약하는 경찰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읽어나가다보면 스페이스 오페라의 단골 고객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미친 과학자)"도 등장한다.
그러나 방심하지 말자. 결론은 여기에 있지 않다. 아 그렇고 그런 이야기구나라고 하는 순간 상상하지 못한 진실이 고개를 들이민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비견되는 하드SF물로는 최근에 듀나의 <태평양 횡단특급>이 나와 문단의 주목을 받고있다. 바야흐로 한국에도 SF물이 다시 중흥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에 고전 SF물의 재출간 및 번역이 나오고 있는 점과도 일맥 상통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와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다시 나왔고, 인문학적인 SF물로 명망이 높은 로저 젤라즈니의 명저들도 속속 새로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