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고종민만이 차츰 춤마당으로 변해가는 그 굿청 한쪽에서 잠시 더 뜨거워져오는 마음을 달래고 있었을 뿐이다.
- 아버지. 권력놀음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이곳 한국에서도 저주스런 비극이자 희극입니다.
그는 한동안 미뤄온 일본의 아버지에 대한 편지의 한 귀절이 그때 문득 머리에 떠오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뒷 귀절을 잇기 위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조급해져가는 마음을 잠시 더 지그시 눌러 참아야 했으니까.
- 하지만 아버지도 알고 계시듯이, 이 땅에는 그 권력놀음의 희생자들과 그 삶을 끊임없이 씻겨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희생자들의 혼령과 생자들의 삶을 위로하고 그 지난한 역사로부터, 그 일방적인 이념의 역사와 억압의 굴레로부터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꿋꿋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염원 속에.....
하고 보니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뒤늦게 터져나온 김상노씨의 느닷없는 통곡 소리는 차라리 물색없는 이변에 가까웠달까. 그렇듯 망자들의 혼령이 떠나가고 굿판이 다 기울 때까지도 그는 마치 남의 굿을 구경하듯 갈수록 더 덤덤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여태 자신의 슬픔을 안으로 눌러 삼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탓인지 모른다. 아닌게아니라 그 할머니에 대한 상노씨의 회한은 그렇듯 깊었을 법도 하였다. 그래 그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혈육들의 혼령을 쉽게 떠나보낼 수가 없었는지도.
--- pp. 2권 182∼182
형은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아우에게 간곡히 자수를 권했다. 자수를 한다 해서 일이 무사할 수는 물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토벌대의 자수 권유 전단을 주워들고 제 발로 토벌부대를 찾아갔다 종적이 사라진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소문이었다. 요행히 목숨을 건지게 된 사람도 죽음 못지 않은 혹독한 책벌이 뒤따르거나 반폐인지경이 되어 나오기 일쑤였다. 자수 이후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쪽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양쪽 다 죽음의 길이 앞에 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그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관용과 재생'을 약속한 자수 권유의 전단 문구라도 믿어보아야 하였다. 천은으로 다행이 목숨이라도 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처벌이나 괴로움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한 사람만이 아닌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아우가 한사코 뿌리치려 하더라도 윗사람 된 형으로써 그가 억지로라도......
그런데 그 아우 쪽도 이젠 더 다른 희망을 지녀 볼 수 없을 만큼 지치고 절망을 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산을 내려온 것도 어떤 자포자기의 심사에서였던 것일까. 아우는 다행이 큰 반항 없이 형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로 아침 날이 밝은 대로 서둘로 형과 함께 자수 길을 나섰다. 하지만 우연이었을까. 이미 어떤 낌새를 알아차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가. 둘은 미처 동네길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골목 입구를 지키고 있던 토벌대 순찰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길로 곧 토벌대 영내로 끌려가 두 형제가 함께 창고에 갇히고 말았다. 자수를 하러 가던 길이었다는 건 전혀 참작조차도 되지 않은 채였다. 연행 과정에서나 초동 조사 과정에서나 그런 소리는 깡그리 무시당했고,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차이는 전혀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아우는 잠입 무장대 잔당으로, 형 쪽은 그나마 그 무장대 아우를 숨겨주고 도피시키려 했다는 낮은 단계 죄목이 씌워진 것이었다.
--- pp. 1권 86∼87
그래도 ^부호가 표시되지 않거나 때로 #표시가 대신 붙어진, 그러니까 육지부 무당에게 위령굿 차례를 맡길 희생자의 폭력과 사례의 증언은 차례로 이어져 나갔다. 무참한 희생을 면해보려 더 깊은 산중으로 피해 들어갔다 계속 조여들어오는 포위망에 갇혀 어린 자식이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았다가 질식을 시켜 죽인 경우하며, 시일이 오래 지난 제 가족들의 시신 더미를 뒤늦게 발견하고도 생전의 모습을 분별할 길이 없어 합동 묘지를 쓴 경우, 사람만 사라졌을 뿐 그도저도 아예 유골조차 찾을 수 없어 허묘를 쓴 사례까지, 굿거리감 목록은 끝없이 이어져갔다. 입산 피해자들은 토벌작전의 제물로, 중간산 주민 가족들은 무장대와의 내통 혐의로, 소개령에 쫓겨 해안으로 내려온 피난자들은 신분 불확실자로 몰려서. 안덕면 상천리 부근의 한 표고버섯 재배장에서, 대정면 하모리와 서귀포 인근 정방폭포 아래서. 이래더저래도 죽을 처지의 반신반의 마지막으로 자수 권유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집단처형으로 죽어가고, 무장대처럼 꾸미고 나타난 토벌대에게 속아 함정토벌의 제물이 되어가고. 한 번은 운 좋게 목숨을 구해 살아났다가도 다음번 예비 검속으로 끌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사람들..... 더러는 총에 맞고 더러는 불에 태워지고 더러는 바다 속에 수장으로. 청죽회나 제중일보 쪽에선 미처 모르고 새로 조사 취합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더러는 이미 은밀한 해원굿을 치렀을 법한 경우까지 포함하여, 그러나 명단 위에 ^표시가 없으니 그 모두가 아직 혼씻김을 받지 않고 떠도는 고혼이요, 이제라도 해원굿을 치러야 할 원혼들이었다.
--- pp. 1권 5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