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눈을 감으니 흔들림이 더욱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몸이 둥실 떴다가 이어서 침대에 내리찍혔다. 동시에 뱃바닥에 파도가 부딪쳐 구궁, 하는 소리가 선내에 울려 퍼졌다. 인생 최초의 격랑 체험이었다. --- p.17p
예이, 휘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쳐들었다. 이거 지금까지 살면서 본 중에 최고의 광경 아닐까. 기억에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갑판 한복판에 큰대자로 드러누웠다. 무슨 이런 파란색이다 있나. 더 바랄 게 없어지지 않나.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이 순간 세계에서 내가 제일 감동하고 있으리란 자신이 있었다. 좌우지간 과장이 심한 소설가 한 명이다. --- p.35~36
접시 위의 갓 손질된 물오징어에 유자즙을 뿌리니 다리를 꿈틀거린다. 대가리와 꼬리만 자른 정어리는 어딘가 롤리타 같은 정취로 요염하게 빛을 발한다. 고추냉이를 곁들여 김으로 싼 참치 간장 절임은 매운 정도가 제각각 달라서 잘못 걸리면 콧속이 아리다. 이 지역 수제 맥주의 쓴맛이 목구멍을 넘어가 가슴 전체에 스며든다. 크으. 얼굴이 ? 마크가 된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어째서 이렇게 맛있을까. --- p.59
여기서 죽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건 싫은데. 다음 달이면 인세가 들어온다고. 어쩌지. 구급차를 부를까. 하지만 그건 너무 호들갑 떠는 것 같은데……. 오른손을 누르는데 환부에서 정체불명의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우우, 이거 뭐야. 엄마아……. --- p.89
이 시기의 괭이갈매기는 조심성이 강한지 손에 든 과자는 먹으려 하지 않았다. 공중에 던진 걸 받아먹거나 바다에 떨어진 걸 먹을 뿐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오쿠다 어린이 완전히 푹 빠졌다. 직접 받는 데 성공하면 나까지 신이 났다. 갑판 스피커에서 관광 안내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기한 바위와 작은 섬이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괭이갈매기와 노는 게 더 재미있는걸. --- p.126
허리에 타월 감아도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슷폰폰, 슷폰폰(일본어로 발가숭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런 일본어는 대체 어디서 배운 겁니까. 욕조에 몸을 담가 땀을 씻은 다음 알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이런 게 바로 무방비 상태다. 또다시 불안이 치밀었다. 이상한 데 만지면 안 돼요. --- p.173
여행은 사람을 감상적이게 한다. 자칫하면 그런 감상은 자기본위적인 사고가 되어 무책임한 착각을 일으킨다. 일방적으로 찾아와 놓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뻔뻔한 행위다. 주민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이 있고 그곳에 여행자가 낄 여지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런 차이를 자각하는 사람이고 싶다. 말없이 찾아와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는 것. 그게 여행하는 이의 예의다. 괭이갈매기 몇 마리가 배를 따라왔다. 냐아냐아냐아. 이별을 아쉬워하듯 우짖는다. 에고. 콧속이 시큰했다.
오쿠다 히데오의 사진은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그 탓에 이를 테면 『남쪽으로 튀어!』의 괴짜 아버지와 『공중그네』의 엽기 의사를 합성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넉넉한 덩치에 잘 웃으며, 배도 좀 나오고 뭐든 잘 먹으면서 헤벌쭉 웃는 그런 아저씨가 떠오른다. 이 아저씨가 일본과 부산까지 항구를 섭렵한다. 예상대로 소박한 미식의 항연(배에서 주는 아침 정식도 맛있다니, 흐음)이 이어진다. 고치의 고등어 회와 초밥, 가다랑어 뱃살에 방어회와 복어내장요리, 멧돼지전골과 고토의 일본 원조 우동에다가 나고야의 하쓰마부시 장어구이와 항구 마을에서 시골 장인 요리사가 막 쥐어 주는 저렴한 초밥세트! 생선 알과 게살로 채운 3단 도시락은 물론이고 성게알 덮밥 곱빼기, 백 퍼센트짜리 순 메밀국수. 더구나 부산의 갈비와 해물파전과 막걸리는 보너스다. 이게 진짜 오쿠다식 먹자여행이다. 그의 유머는 여전해서 버스 안에서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었고(큭큭큭), 구석구석에 덫처럼 쳐 놓은 사람에 대한 따스한 묘사는 이미 그의 소설에서 본 바와 같다. 생각건대 항구마을이라니, 참 아이템 절묘하다. 사람, 바람, 하늘, 바다에 음식과 망각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