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잠에서 깬 사랑은 낯선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어제 일을 기억해 냈다. 생소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편안하고 깊게 잠이 들었던 건 정말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설치는 게 다반사였는데, 오히려 집보다 편안하게 숙면을 취했던 것이다.
사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키니 진에 긴 팔 티셔츠로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새벽공기가 제법 쌀쌀한 게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곤 목을 돌려 스트레칭을 하면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시골의 상쾌한 아침공기가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었다.
그녀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어제는 선우에게 이곳이 싫다고 투정했었지만, 그것 또한 그녀가 했던 다른 말들처럼 본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김선우, 당신은 이런 곳에서 자랐구나.”
사랑은 자신이 제일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세수를 했는지 앞머리가 촉촉이 젖은 은비가 그녀에게 조르르 뛰어왔다.
“언니야, 나 학교 갔다가 올 건데요. 여기 있을 거죠? 빨리 갔다 올게요. 꼭 있어요.”
“싫은데?”
“몽이랑 놀고 있어요. 학교 갔다 와서 동네 구경시켜 줄게요.”
“생각해 볼게.”
“그럼 빨리 갔다 올게요.”뛰어가는 은비를 바라보던 사랑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 쪽마루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보자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아늑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 이곳 또한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자 왠지 서글퍼졌다.
“뭐 해?”
어느새 다가온 선우가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도망갈 궁리요.”
“훗, 어디로? 여기서 참고 한번 지내 보지 그래? 그리 나쁜 곳은 아니니까,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말이야.”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할 것만 같은 여유로운 표정과 편안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선우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자라면 저렇게 되는 걸까?’
그녀는 항상 미간을 찌푸리거나 무표정하게 있는데 선우와 이곳 식구들의 표정은 달랐다. 사랑은 자신과 이곳 사람들과의 이질감이 더 크게 느껴져 왼쪽 가슴이 쏴하게 아렸다.
“스타벅스 아이스커피 마시고 싶다.”
“녹차 마셔.”
“베이글도 먹고 싶고.”
“밥이 보약이라잖아.”
“뭐, 내가 좋아하는 건 하나도 없네요.”
“있어.”
선우는 사랑의 얼굴을 양손으로 받치고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키스.”
“그건 당신이 좋아하는 거잖아요.”
“음, 그런가? 난 투덜거리는 네 입만 보면 자꾸 이러고 싶어지거든. 이곳이 좀 보수적인 곳이라 참고 있는 중인데 자꾸 도발하면 할 수 없지. 한 번 더 할까?”
“됐거든요?”
“아쉽군.”
정말 아쉬워하는 듯한 선우의 표정에 사랑은 얼굴을 확 붉혔다. 세수도 아직 안 하고 이도 안 닦은 상태에서 키스라니, 절대 안 되었다.
“에로 대마왕!”
“어쩔 수 없잖아. 너무 오래 참았는걸.”
“에로 중년!”
“중년까진 아직 멀었는데?”
그녀의 달콤함을 온몸으로 확인하고 기억하는 그로선 눈앞의 사랑을 안지 못하는 시간들이 고문이었다. 다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참는 중이었고, 그녀의 육체만이 아닌 모든 것을 원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뿐이었다. “슬리퍼 가져왔으니까 당분간 신어. 아침 먹고 있다가 읍내에 가자. 필요한 것도 좀 사게.”
그러고 보니 오늘 그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아주 평범한 복장인데도 적당한 근육 때문인지 아님 수려한 외모 때문인지 모든 게 특별할 정도로 멋져 보였다.
“아침 먹게 본채로 와.”
선우는 대답이 없는 사랑의 반응을 알았다는 의미로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후 세수를 한 사랑이 안채의 방으로 들어가자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커다란 자개상 위엔 그녀가 좋아하는 간고등어가 맛깔스럽게 구워져 있었다.
“사랑이 처자 여 앉그래이.”
새로운 객식구라고 간고등어를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는 유씨 아주머니와 숭늉이 고소하다며 건네주는 김씨 아주머니의 정겨운 태도에 사랑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 집은 아침식사가 좀 일러요. 우리 은비가 아침부터 사랑 씨를 찾던데, 귀찮게 하지 않았어요?”
“뭐, 별로요.”
“우리 은비가 친구가 없어서 그래요. 귀찮으면 말해요.”
푸성귀뿐이라 맛이 없다던 투정은 언제 했냐는 듯, 사랑은 여러 종류의 나물과 김치, 장아찌와 함께 맛있게 밥을 먹었다.
“아이고, 사랑이 처자, 복시럽게도 먹는데이.”
아침식사를 마치자 사람들은 다 같이 뒷정리를 하면서 가사 일을 분담했다. 사랑이 뭘 해야 할지 몰라 어벌쩡하게 서 있는데, 정현이 그녀를 불렀다.
“사랑 씨는 도련님 따라 장에 갔다 와요.”
뒷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개를 까딱인 사랑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선우를 따라나섰다.
잠시 후 선우의 차 조수석에 앉은 사랑은 팔짱을 끼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흠칫 놀랐다. 안전벨트를 매주려는 선우의 행동을 마치 키스를 하려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선우는 겨우 차 한 대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좁은 산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다 산비탈에 일궈 놓은 사과밭을 지나 왼쪽에 있는 기와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러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서 지갑을 들고 나와 다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까 거긴 누구 집이에요?”
“내 집.”
“뭐요? 당신 가족들하고 같이 사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럼 자기는 살지도 않으면서 나만 저 집에 처박아 놓은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욧!”
“거기 있는 게 나아.”
왠지 사기를 당한 느낌이라 사랑은 미간을 팍 구긴 채 선우를 노려보았다.
“나도 잠만 집에서 자고 생활은 주로 거기서 해.”
“너무해요.”
“밤에 내가 덮쳐도 좋다면 옮기든지.”
사랑이 급격하게 조용해지자 선우는 입 꼬리를 올렸다.
“너랑 같이 있으면 잠자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든가, 아님 다른 의미로 밤을 새우게 되겠지. 뭐 후자 쪽이라면 좋겠고.”
선우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한 사랑은 볼을 붉히면서 그저 입을 꼭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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