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을 지고 묵상을 하듯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는 걸음, 200년 전 다산 역시 이 길을 따라 매일 초당으로 올랐을 것이다. 한참을 오르자 드디어 평탄한 길이 나오고 가까이 다산초당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가슴 깊숙이 육지를 품어 안은 큰 바다가 보였다. 백두산 기슭에서, 지리산 기슭에서, 한반도 곳곳에서 촘촘히 땅으로 스민 물들은 작은 시내와 큰 강을 따라 건너와 마침내 이곳에 이르러 있었다. …… 불행했던, 하지만 위대했던 그의 삶 앞에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혈기 넘쳤던 대학 시절과 시민운동가 시절을 거쳐 고 김대중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던 청와대 시절, 국회의원 시절, 그리고 지금 고양 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까지. 나는 다산처럼 청렴하게, 올곧게 살아왔던가? 다산처럼 국민을 애틋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직자의 길을 걸어왔던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시기를 맞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가로서 역사에 부끄러운 일들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슴속에 여러 회한들이 밀려왔다. 다만 어느 곳에서든지 최선을 다해 나의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며 천천히 길을 내려왔다.
---'프롤로그 :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의 마음을 기억하며' 중에서
다른 벼슬은 스스로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
다산은 목민관이라는 벼슬을 그 어떤 벼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중앙의 관원들이야 왕을 잘 받들어 모시고 자신이 속한 기관의 사무를 잘 처리하기만 하면 문제될 게 없으나, 목민관이 만약 잘못을 한다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18년간의 긴 유배 생활을 하면서 가난과 관리의 탐학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참혹한 정경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다산으로서는, 그 어떤 벼슬보다 민생을 책임지는 목민관이라는 벼슬이 중요했다.
다산이 살던 시대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목민관이라는 벼슬을 구하러 다니는 자들이 횡행하던 때다. 무관들은 제 발로 전관(銓官 : 문관과 무관의 임용을 관장하는 관리)을 찾아가 수령 자리를 구걸하기 일쑤였고, 문관들 역시 홍문관이나 승정원의 관리로 있으면서도 수령 자리를 구걸하곤 했다. 그들은 대개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효’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목민관이란 백성을 기르는 자이지 부모 봉양을 위해 녹을 받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1장 '부임육조 - 신임 목민관의 부임' 중에서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빛나면 이 역시 인생의 지극한 영화이다.
청렴한 사람은 주위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법이다.
만약 주위에 다산이 일컫는 청렴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게 어디 한 사람으로 그치겠는가? 그 사람을 보고 배운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줄 테고,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면 청렴도 흔한 것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 참된 스승 하나쯤 섬기는 것도 좋은 일일 듯하다. 물론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거치면서 많은 스승을 만나지만, 한 생을 살면서 길잡이가 되어 줄 마음속의 스승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이라면 한 생의 스승으로 삼아도 좋지 않겠는가. ---2장 '율기육조 -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전제 조건' 중에서
버릴 기(棄). 다산은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자를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외압이 들어오거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거나, 윗사람이 부당하거나,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면 서슴지 말고 벼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목민관의 윗사람인 감사조차 언제든지 벼슬을 가볍게 버릴 수 있는 자신을 가벼이 보지 못하고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니, 그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웅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필자가 대통령을 모실 때나 청와대에 재직할 당시 중요한 건의를 하고 그것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관철되지 못했을 때 사의를 표명하고,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나왔던 것도 다산의 이런 강건한 정신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3장 '봉공육조 - 공무를 수행하는 기본 규칙' 중에서
흉년에는 자식 버리기를 물건 버리듯 하니, 거두어 주고 길러 주어 백성의 부모가 되어야 한다.
기근이 든 해가 아닌데도 버려진 아이가 있을 경우 거두어 기를 사람을 모집하되 관에서 그 양식을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의 수준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결식아동들의 식대가 형편없는 수준이었음이 밝혀져 사회적 문제가 됐을 때 많은 이들이 공무원들을 나무랐지만, 그것은 공무원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세금을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도 중요하다. …… 남과 쾺의 화해와 화합, 통일이 문제 해결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이 신뢰를 바탕으로 화해하고 더 나아가 통일을 이룬다면 해마다 지출되는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줄일 수 있고, 이렇게 남은 국고를 사회 보장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무기를 녹여 보습을 만드는 것이다. 버려지고 소외받는 우리의 아이들이 진실된 사회의 구성원으로 건강하게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4장 '애민육조 - 어진 마음으로 다스리기' 중에서
다산은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마쳤다면 그동안 수고했던 사람들을 위무하는 잔치를 여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다만 이런 조건을 달고서 말이다.
“잔치를 여는 것은 수고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지 기뻐서 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죽은 자가 1만 명 가량 되고 매장하지 못한 주검도 그만큼 되며 살아남은 자도 병에 걸려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주린 창자에 보리밥으로 과식하여 죽는 이 또한 많다. 이런 때에 어떻게 즐긴단 말인가. 큰 흉년 끝에 수령이 이 잔치를 베풀면 모든 백성들이 장구 소리와 노랫소리를 듣고 한탄하며 성난 눈으로 바라보니, 기악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다산의 이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때만 되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진다. 호남의 폭설 피해, 영남의 폭우 피해, 강원도의 눈사태 등등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이재민을 도우려는 온정의 손길이 곳곳에서 뻗치는 때에, 골프를 치러 다닌다거나 거창한 회관에서 연회를 갖는 공직자, 위정자들이 없는 경우란 한 번도 없었다.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좋은 일을 하고서도 잔치를 크게 벌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국민 구제와는 전혀 상관도 없으면서 국민이 고통받고 있을 때 어찌 골프를 치거나 룸살롱을 갈 수 있단 말인가.---11장 '진황육조 - 재해로부터 민생을 다스리는 방법' 중에서
흔히들 윗사람을 보지 말고 아랫사람을 보라고 말한다. 윗사람의 귀여움을 받는다 하여 그 사람이 덕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나 아랫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산도 설령 목민관이 죄를 지었더라도 백성들이 슬퍼하여 그 죄를 사해 주기를 청한다면 용서해 주는 것이 또한 백성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 죄가 백성들을 위하다가 피치 못하게 지은 죄라는 걸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목민심서》는 애민(愛悶)에서 시작하여 유애(遺愛)로 끝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목민관이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 역시 사랑과 존경으로 보답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목민심서》 마지막 장의 마지막 조가 '유애'임은 퍽 의미가 깊다.
---12장 '해관육조 - 유종의 미를 거두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