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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위로 너를 묻다

가슴 위로 너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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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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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0년 0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416쪽 | 390g | 128*188*30mm
ISBN13 9788993886764
ISBN10 899388676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재희는 바싹바싹 타 들어가는 속을 달래느라 무단히 애를 썼다. 기가 센 사람이 따로 있다더니 아마 저런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눈빛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미간을 내리꽂는데 기가 질렸다. 표정이 어둡고 건조했다. 눈가는 슬픔이 가득하여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공허함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엷은 비웃음을 지었다.
“넌 네 앞길도 제대로 판단을 못하는군.”
“네?”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고 가라면 갈 텐가?”
순간 당황하여 말이 나오질 않았다. 무어라 대항을 하고 싶은데 눌린 기가 갑자기 펴질 리는 만무하고 그저 억울한 감정만이 솟구쳐 올랐다.
재희는 간신히 떨림을 잠재우고 대신 당당함을 깨웠다.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직감했으니 기세를 휘어잡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 가정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갈 테니까.
“전… 여기 일하러 왔어요. 선생님께 충고를 들으러 온 게 아니라고요.”
그는 재희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차분한 손짓으로 물병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뭔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군. 넌 여기 있을 수 없어.”
비아냥거리듯 말하더니 태연하게 물병을 들고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자, 재희는 오기에 오기가 덧붙여졌다. 이제는 버티려는 오기가 아닌 이대로 그냥 나갈 순 없단 오기였다. 아무리 가정부라 해도 이렇게 무시하는 법은 없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돈이 급하긴 했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자존심이었다.
“가라면 가죠. 저도 당신 같은 사람 위해서 밥하고 빨래할 생각 없어요.”
이번에도 무시하겠지,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쿡 찔러도 피 한 방울, 감정의 미동조차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반응을 보이자 재희는 겁이 나기보다는 오히려 통쾌했다.
“전에 가정부들이 못 버티고 나갔다던데 그게 다 선생님 때문이었네요. 다들 울면서 뛰쳐나가던가요? 하지만 이번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이래 봬도 수백 명, 아니 수천 명 상대하고 하직하는 길이니깐.”
“네가 창녀라도 되나?”
그가 돌아서지 않은 채로 목소리만 울렸다. 기가 막힌 질문에, 재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껌벅거렸다.
“뭐, 뭐라고요?”
“네 말이 그렇잖아.”
“이봐요, 말이면 다인 줄…….”
“아무튼 그만 가줬으면 해. 난 네가 필요 없어. 게다가 너, 눈빛이 너무 굶주려 있어.”
기가 막힌다는 말이 바로 이럴 때 나오는 말인가,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사람을 이상하게 매도시키곤, 그래놓고 무심히 돌아서는 그가 너무나 황당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돌아설 수도 없었다. 이대로 대꾸도 못하고 물러선다면 사흘 밤낮을 끙끙 앓을 것 같았다. 그래, 무어라 한 마디는 쏘아붙여야…….
“나 선생님 같은 분 잘 알아요.”
뒷덜미가 당기는지 그가 다시 멈춰 섰다. 불쑥 내뱉어놓고 아차 싶어 재희의 심장도 멈춰선 기분이었다.
“저, 전에 일하던 식당에서… 선생님 같은 사람 몇 번 본 적 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만날 와서 혼자 밥 먹는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불쌍한 일인지 모르시죠? 자기가 소외된 줄은 모르고, 마치 자기가 남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착각하는 거. 그거 무진장 불쌍한 일이거든요.”
목소리 한 음 떨지 않고 줄줄 새어나오는 통에 재희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후회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마구 솟구치는 강단(剛斷)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놈은 더 당해도 싸니까.
이번엔 기고만장한 저 남자가 어떻게 나올까, 뒤돌아 감춘 얼굴은 새빨개져 있겠지. 열이 바짝바짝 올라 머릿속이 텅 비었을 테다.
재희는 곧바로 옆에 놓인 가방을 잡아들었다. 이로서 여기는 끝이다!
“그 가방 내려놔.”
또다시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재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실려 있지 않았다. 화도 없었으며 아까와 같은 비아냥거림도 없었다.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평정심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네?”
“그 가방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가 돌아서고 다시금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우물쭈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헤매는 재희를 향해 그가 또박또박 엄명하듯 말했다.
“가방 내려놓으라니깐.”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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