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자기 엄마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실몽당이를 주절주절 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일단 풀기 시작하면, 그게 어디로 그녀를 데려갈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멀리, 너무 깊이, 너무 어두운 곳으로 이끌고 갈 공산이 컸다. 당장에는 자신의 자취를 되짚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속내를 감추고 남을 속일 용기는 있어도, 지난 일을 돌이켜볼 용기는 없었다.
--- p.36
그녀는 진위가 분명치 않은 이론 하나를 떠올렸다. 물에 빠져서 가라앉고 있을 때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이 없고 바닥에 닿기를 기다렸다가 발뒤꿈치로 바닥을 차야만 수면으로 다시 올라올 수 있다던가…….
됐어.
이제 바닥에 닿은 거야, 안 그래?
--- p.185
“그냥…… 나에겐 전압 조절이 잘 안 되는 문제가 있어서 그래.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종종 나에게 버튼 하나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 볼륨을 조절하는 버튼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언제나 이쪽이나 저쪽으로 너무 멀리 가. 적절한 균형을 잡지 못해 언제나 일이 나쁘게 끝나. 내 성향이 그래…….”
--- p.270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면,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이러고저러고 설명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카미유를 웃기기 위해 자기네 셰프가 전화를 한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영리하게도 놀라는 시늉을 해서 그의 실없는 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탁구를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그의 예상을 찌르는 스매시를 날리곤 했다. 덕분에 그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서도 자기가 바보 같다는 느낌을 덜 가질 수 있었다.
--- p.290
이건 하나의 가정이다. 확언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확신이란 결코 요지부동한 것이 아니다. 어느 날은 죽고 싶도록 사는 게 암담하다가도 이튿날에는 몇 계단 내려가서 스위치를 찾아내기만 하면 눈앞이 조금 더 환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어쨌거나 이들 네 사람은 다가올 시간을 자기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나날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p.125
“왜 내가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쏟아내게 만드는 거야? 이런 게 무슨 재미가 있다고 그래?”
“저는 사람들이 속내를 털어놓을 때가 무척 좋아요.”
“왜?”
“모르겠어요. 그건 자화상 같은 거 아닐까요? 말로 그리는 자화상이요.”
--- p.157
“…(중략)… 고흐가 자기 몸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을 나는 생생하게 느껴요. 그의 온갖 고통은 그저 말이 아니라고요, 알겠어요? 그건…… 아니, 난…… 그의 작품에는 관심이 없어요……. 아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건 그게 아니에요. 내가 읽은 건, 사람들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하면 고통을 받는다는 거예요. 지독하게 고통을 겪다가 결국은 죽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 되죠. 난 그렇게 죽지 않을 거예요. 고흐에 대한 우정과 형제애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죽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 p.176
그냥 내버려둬. 너는 이런 거 이해 못해. 네가 어떻게 이런 걸 이해할 수 있겠니? 카미유, 너에겐 풀어야 할 매듭이 너무도 많아. 네 그림들은 아름답지만, 너는 네 내부로 완전히 오므라들어버렸어……. 나는 네가 살아 있다고 믿었어. 그걸 생각하면 기가 막혀. 내가 그렇게 큰 실수를 한 것으로 보아 그날 밤 내가 마리화나에 취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너는 그저 너무 굶주려서 왔던 것인데, 나는 네가 사랑을 나누러 왔다고 생각했지. 정말이지 내가 멍청했어…….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