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1만여 명의 한인과 독립 운동가들로 북적이던 신한촌은 러시아인이 거주하는 아파트만 들어서 있을 뿐 한인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70년의 세월이 그 모든 흔적을 지워버렸다. 아니, 그렇게 된 데는 우리의 무관심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모든 흔적은 사라지고, 흔적을 기록한 신한촌 기념탑만이 라게르 산 정상에 서 있다. --- p. 24
이 박물관에는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연해주 지역에서 생산된 석탄, 아연, 수정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광물을 캤던 광부 중 다수가 한인이었다. 그들은 광산에서 번 돈을 독립자금으로 제공했단다. 독립은 영웅들만의 공은 아니었다. 묵묵히 광산에서 채굴하던 한인 광부, 고려사범대학의 교사,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던 지신허·연추 마을의 농부도 한몫했던 것이다. --- p. 34
대역사로 완성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출발지에서, 이 역사를 통해 도처로 오고 갔을 수많은 독립운동의 영웅을 떠올려보았다. 1907년 용정으로 망명해 해외 최초의 한인 근대학교 서전서숙을 운영하던 이상설이 이준과 함께 밀사의 칙명을 받고 모스크바를 거쳐 헤이그로 갔던 출발역도,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출발한 역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었다. 이상설, 이준, 안중근만이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독립군과 독립투사가 이용했던 이 기나긴 철도는 독립의 꿈을 실어 나르던 꿈의 길이었다. --- p. 35
국권이 피탈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이범진은 1911년 1월 13일 자결했다. 그는 고종 황제에게 “우리의 조국 한국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이범진이 택한 마지막 저항은 자결이었으나 자결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헌납했다. 자신은 비록 자결해도 조국은 반드시 독립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p. 50~51
이번 연해주 독립운동지 답사에서 만난 가장 감동적인 인물이 최재형이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를 조국은 연해주로 내몰았지만, 그는 결코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다. 러시아 선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최재형은 군납을 통해 연해주 최대 거부가 되어 전 재산을 조국 독립에 헌납했다. 구한말 의병 조직인 동의회 총재, ≪대동공보≫ 사장, ≪대양보≫ 사장, 권업회 총재, 대한국민의회의 명예회장 등 그에게 붙은 직함은 연해주에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p. 54
저(홍범도의 손녀딸 김알라)는 어렸을 때부터 “나는 홍범도, 뛰는 홍범도”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레닌을 만났을 때 레닌이 “너를 도와줄 일이 뭐 있는가?” 하자,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다만 너의 군대를 빌려 달라. 나는 일본 군대를 무찌르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4년 동안 독립군 활동을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홍범도를 잡으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소련과 북한에서 2개의 관이 왔습니다.--- p. 68
2004년 5월 9일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 기념사업회가 세웠고 대한민국 음악인 서태지가 헌정했다고 적혀 있었다.…서태지가 50만 고려인 역사의 첫 장을 연 지신허 마을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지신허 마을 옛터’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쉽지만 누구도 할 수 없는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민족의 아픔을 희망으로 풀어내는 역사의식이 투철한 음악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태지가 한참 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민족에 대한 그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다. ‘지신허 마을 옛터비’ 앞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키워내는 것이 교단을 지키는 사람들의 역사적 책무임을 가슴에 새겼다.--- p. 84~85
김약연이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솔선수범해서 실천한 삶 때문이다. 그는 명동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도 일꾼조차 두지 않고 1,000평가량 되는 땅에서 밭농사를 짓고, 농민들과 함께 밤을 새워 타작했다. 또한 독립운동을 위해서라면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 협력하고 도왔다. 목사지만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손을 잡았으며, 서일 등 대종교 지도자에게도 협력했다. 김약연은 종교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돕고 껴안는 포용력과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 p. 132
15만 원 탈취사건은 1919년에 일어난 3·13만세운동으로 대표되던 비폭력 독립운동이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의거였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1919년 겨울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은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활동하던 중 조선총독부가 회령에서 용정으로 조선은행권 15만 원을 우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들은 1920년 1월 4일 동량 어구의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현금 수송마차를 습격해 무장한 호위경찰 2명과 은행직원 4명을 살상하고 철궤에 담긴 지폐 15만 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 p. 146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은 한국과 일본의 애증관계를 말할 때 흔히 사용된다. 그런데 이 말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관계에서도 통용된다.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인에게 늘 지배당한 ‘한 많은’ 민족이었다. 1169년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정복과 지배는 1922년 아일랜드자유국이 세워질 때까지 750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륭양행 사장 쇼가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도운 이유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쇼가 어떤 인물이며, 얼마나 한국을 사랑했고,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는 몇몇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은 3·1운동 직후 압록강 철교를 건너 안동을 거쳐 상해로 망명할 때 쇼의 도움을 받았다.--- p. 170
한국 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의거 현장은 플랫폼 가까이에 있다. 안중근 의사 의거지는 삼각형으로, 거기서 7미터 정도 떨어진 이토의 피살 현장은 마름모 안에 직경 10센티 정도의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삼각형을 그려놓은 그 자리에서 대한국 참모중장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를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올려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를 외쳐댔다. 하얼빈 역에 남아 있는 안중근의 흔적은 그것이 전부였다. 푯말 하나, 안내판 하나 없었다. --- p. 212
1910년 2월 12일 최종 6차 공판에서 안중근은 최후진술을 했다. 이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매우 논리정연하게 설파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죄, 일본 천왕과 일본 정부를 속인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하고 한일 간을 멀어지게 한 죄. 그래서 대한국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의 의병으로 적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으니 만국공법에 의거해 처리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월 14일 안중근에게 내려진 판결은 사형이었다. 그리고 40일 뒤 사형이 집행되었다.
--- p. 226